376년에 이르러 화북통일을 완료한 전진에게 있어서 남은 적은 동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진 내에서도 많은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중 왕맹은 동진 정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왕맹은 부견이 그의 임종시 머리맡에서 후사를 뭍자「진을 공격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진은 내부적으로 결속이 단단하고 국력도 강합니다. 또한 동진은 장강이라는 천험의 지형을 안고 있어 쉽게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선비족 출신인 전연에서 항복한 모용수와 강족의 귀족 요장이 더 위험합니다. 투항하긴 했으나 그들은 전진의 오랜 숙적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훗날 큰 후환이 될 것이다. 서서히 그들의 힘을 꺾고 제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라고 말하며 동진 정벌에 뜻을 두고 있던 부견에게 자중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왕맹은 375년에 죽으면서 부견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유언을 보냈습니다.
「동진은 오월 지역에 치우쳐 있지만 정삭을 계승한 정통 왕조입니다. 이웃 나라와 우의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일입니다. 신이 죽은 후에도 동진을 공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부견 자신은 동진 정벌에 대한 강한 의욕을 드러냈습니다. 그에게는 천하통일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뿐만 아니라 동진의 현실적인 위협을 어느정도 처리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화북통일전쟁을 수행한 100만에 가까운 자신의 군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는 382년에는 동진 정벌의 위험을 예상한 명승(名僧) 도안(道安)의 충고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대업을 계승해 거의 20년이 되어 가고 있다. 달아나는 적을 진압하고 사방을 거의 평정했으나 다만 동남의 모퉁이에 아직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다.」
「이 원정은 영토확장과 인구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천하를 통합하여 민중을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하고 싶을 뿐이다. 더욱이 이 원정은 정의의 전투이다. 영가의 난 이래, 강남에 떠돌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그들을 어려움으로부터 구하여 인재를 등용하기 위함이었고, 무력을 휘두를 생각은 없다.」
부견의 생각은 동진 정벌은 확고 했으며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378년 서장자(庶長子)인 부비에게 명령하여 12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양양 공격을 개시하게 하였습니다. 양양은 한수에 연결된 수륙의 요충지로 옛날부터 군사, 통상,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당시 이곳에는 감면중제군사(監沔中諸軍事) 남중낭장(南中郎將) 양주자사(梁州刺史) 주서(朱序)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주서는 전진의 공격에 잘 버텼지만 다음해인 379년 2월에 주서가 성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양양은 함락되었습니다. 부견은 주서를 도지상서(度支尙書)에 임명하였습니다. 또 부견은 동진의 동부 지역에도 군사를 보내 같은해 5월에는 간이(肝貽)를 함락시켰습니다. 간이 함락으로 인해 전진의 군사는 광릉(廣陵) 근처까지 육박하였습니다.
물론 동진에서도 전진의 이러한 공격을 넉놓고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376년에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된 사현(謝玄)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광릉에 배치된 이후부터 하류 장강지역 5개 주(양주, 예주, 서주, 연주, 청주)의 군사권을 쥐고 병사들을 맹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동진군은 전진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여 4전 4승을 거두어 전진의 군사를 회수 이북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합니다. [1] 하지만 이러한 동진의 공격은 전진과 동진 사이의 전국(戰局) 타개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하였고 사전작업을 마무리한 부견은 동진 정벌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382년 1월 부견은 신하들을 모아 강남을 친히 정벌할 계획에 대해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신하들의 의견 대부분은 반대를 표했습니다. 심지어 부견의 동생인 부융(苻融)은 「전진은 몇 년 동안 계속 전쟁을 벌여왔기에 병사들은 지치고, 나라는 피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군마를 쉬고 하고 나라의 내실을 기울여야 할 시기입니다.」라고 말하며 반대를 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아들 부질(苻詄)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부견의 신임이 두터운 승려인 도안도 반대하였습니다. 다만 모용수와 요장만은 부견의 동진 정벌에 찬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부견은 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부견은 「우리 군대 한 사람 한 사람이 채찍을 던져넣기만 해도 장강의 흐름 정도는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하며 동진 정벌에 승리를 장담하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383년 5월 전진의 공격 의도를 눈치챈 동진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에게 양양을 공격토록 하고 보국장군(輔國將軍) 양양(楊亮)에게 촉(蜀)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전진은 이러한 동진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부견은 동진 정벌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오호십육국 최대의 전투인 비수대전의 막이 오른 것이었습니다.
부견은 정남장군 부융, 표기장군 장자, 무군장군 부방, 위군장군 양성, 평남장군 모용위, 관군장군 모용수에게 25만의 보병과 기병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융족 군사 60여 만명과 기병 27만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했습니다. 편의상 동방군이라고 불리는 군대는 팽성(彭城)에서 출발했으며 서방군은 촉과 한중에서 출발해 장안과 한수를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주력군은 경수(熲水)를 내려와 항성(項城)으로부터 건강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10월에는 부융이 비수에서 가까운 수춘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또 양성은 비수의 지류이자 수춘의 동쪽에 위치한 낙간(洛澗)까지 진군하였습니다. 수춘에서 건강까지는 약 200km 남짓한 거리였습니다. 전진의 위협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진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재상이었던 사안(謝安)의 동생인 사석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하였고 형의 아들인 사현을 선봉 군단장으로 삼아 육군과 수군을 합쳐 7만의 병력을 투입하였습니다. 비록 동진이 투입한 군대는 전진에 군대에 비한다면 모래알과 같은 수준이었지만 전국에서 소집한데다가 오는 도중에 더위를 먹어 병에 걸린 병사들이 증가하여 기세가 상당히 꺽인 전진군과는 달리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른 동진의 군사들은 전투라면 이골이 나있는 정예병 중의 정예병이었습니다. 이런 정예병을 이끈 사석과 사현은 간이에서부터 낙간으로 진입하여 양성의 군사를 기습하여 양성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비수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부견이 이끄는 본군도 수춘으로 나아가고 수춘 동방의 비수 서쪽 기슭에 진을 치고 동진 군사와 대치했습니다.
선봉장인 양성이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진군대를 과대평가한 부견은 동진 군사들이 비수를 건너게 하여 물가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전진 군사가 비수에서부터 후퇴할 즈음에 전진 군대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사현은 이를 놓치지 않고 전진군을 공격했습니다. 사현이 이끄는 군대는 전진군에게 4번을 싸워 4번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큰 공을 자가 바로 유뢰지였습니다.
「태원(太元 : 376 - 96) 초기에 사현은 북쪽의 광릉에 주둔했다. 당시 부견은 바야흐로 흥성하게 되었고 사현은 용감한 자들을 많이 모집했는데, 유뢰지와 동해의 하겸, 낭사의 제갈간, 낙안의 고형, 동평의 유궤, 서하의 전락, 진릉의 손무종 등이 용맹하여 선발에 응하였다. 사현은 유뢰지를 참군으로 삼고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서 백전백승하여 북부병(北府兵)이라고 일컬었으며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이 공격으로 인해 전진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 와중에 부융이 전사했으며 군사의 70-80%를 잃는 대 참패를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견 자신도 화살에 맞는 부상을 당하고 수행원 1천 기를 이끌고 가까스로 회수를 건너 모용수가 이끄는 군단에 몸을 의지하였습니다. 전진의 군사들 중에 피해가 없었던 것은 모용수가 이끄는 3만 명의 군대 뿐이었습니다.
epilogue 1
비수의 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무렵 건강의 동진 조정에서는 사안이 전쟁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안은 침착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고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태도는 불안에 떨고 있던 수도와 조정의 분위기를 가라앉히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안은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비수에서의 승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안은 승전보를 듣고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원래대로 바둑만 계속 두었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애송이들이 적을 무찌른 것뿐입니다.」라고만 대답하고 계속 바둑을 두었습니다. 이윽고 손님이 돌아가고 그는 자신이 신고 있던 나막신의 굽이 부러져 있는 것도 모르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epilogue 2
부견이 간신히 모용수의 군단에 몸을 의탁했을 떄, 당시 모용수의 휘하에 있던 자제들과 막료들은 이 기회에 부견을 죽이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 한다고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모용수는 그들의 의견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대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몸을 의탁해 왔다. 그런데 어찌 그를 죽이겠는가? 일찍이 내가 망명했을 때, 그는 나를 국사(國士)로 받아들여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 후 왕맹에게 살해당할 뻔 했을 때도 또한 나의 혐의를 벗겨 주었다. 그 은혜에 아직 전혀 보답을 못했다. 진나라의 명운이 다했다면 그를 죽일 길은 언제라도 있다. 그 때가 오더라도 함곡관 서쪽에 대해서는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대신 그 동쪽에서 연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모용수는 부견을 받들어 병사를 모아 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1] 이 공으로 사현은 후(候)에 봉해졌고 그리고 사안은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위진남북조사(노간),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