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끝은 안 좋았지만 어찌되었든 오호십육국의 여러 군주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군주로 손꼽히는 전진의 3대 황제인 부견(苻堅)은 전진의 초대 황제였던 부건(苻健)의 동생인 부웅(苻雄)의 아들로 337년 업성에서 태어났습니다. 부견은 할아버지인 부홍이 후조의 군주였던 석호를 따라 업에 거주했기 때문에 8세부터 유학적 소양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부견은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박학다식하여 할아버지였던 부홍(苻洪)의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새롭게 성장하는 전진의 기대주로 자라던 부견은 354년에 아버지였던 부웅이 전사하자 아버지의 작위였던 동해왕(東海王)의 작위를 이어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357년에 그에게 있어 최고의 모신(謀臣)인 왕맹(王猛)을 만나고 그를 등용합니다. 그 밖에 그는 여파루(呂婆樓), 강왕(强汪), 양평로(梁平老) 등 한족과 저족 출신 영호(英豪)들의 보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347년 6월에 왕맹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죽이고 전진의 4대 황제로 등극합니다. 부견은 부생을 죽인 이후에 스스로를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렇게 전진의 군주에 오른 부견은 왕맹의 건의로 부건 이후 경제력 회복 정책인 중상주의 정책을 중농주의 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부견은 세력이 강한 상인인 조철(趙掇)의 이익을 억제하는 한편 관중의 관개 시설의 복구와 장안을 시작으로 하여 병주(幷州)지방의 흉노와 선비족 수만 호를 장안에 사민(徙民)을 전개하여 농업 기반 정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흉노와 선비뿐만 아니라 전연을 멸망시킨 이후에는 동방의 산동*하북지역에서 한인 호족(豪族)과 호족(胡族) 약 10만 호와 관동의 호걸(豪傑), 잡이(雜夷), 오환(烏桓), 정령(丁零) 등을 관중에 이주시켜 부국강병에 힘썼습니다. 또한 부견은 왕맹의 계책에 따라서 농민 보호를 위해서 전조(田租)를 감면하고 왕후(王候) 이하 호부(豪富)의 동예(憧隸) 3만 명을 징발해서 경수(涇水) 상류에 구거(溝渠)를 뚫어 전토의 개척*관개시설로 관중 부지의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렇게 경제정책에도 힘을 썼지만 부견은 교육제도 정비에도 힘을 썼습니다. 부견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한문화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을 시정방침으로 삼았기 때문에 각지에 학교를 세워 공경(公卿) 이하의 자제를 태학에 입학시켜 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고 서민에 대해서도 일경(一經)에 통하고 일예(一藝)에 뛰어난 자를 임관시켰습니다.
또 왕맹은 법제를 정비하고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질서 확립을 도모했습니다. 그는 특히 저족의 지배층이 한인을 능욕하여 저족과 한족 사이에 민족적 알력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기에 이런 저족들을 가차없이 탄압하여 저족의 종족주의를 타파해서 호한 융합을 도모했습니다. 또 관료기구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렇게 부견은 경제, 교육, 법과 제도 등 다방면에서 강력한 정책을 취하여 전진의 국력 강화에 힘썼습니다. 물론 이런 와중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견은 그의 치세 전반에 해당하는 360년대 중엽까지 도민(屠民)과 흉노, 강족의 반란과 전연과 전량으로부터의 압력 및 부씨 일족의 반란 등을 모두 제압하고 368년경에 이르러서는 국내 안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국가 정비에 성공한 부견은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임합니다. 우선 모용각 사후 모용평의 전횡으로 국력이 약해진 전연을 공격하였고 370년 11월에는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전연을 멸망시켰습니다. 이어서 371년 4월에는 부아(苻雅), 양안(楊安) 등을 파견하여 전구지(前仇池)를 복속하였고, 376년 8월에는 구장(苟萇), 양희(梁熙), 요장(姚萇) 등을 파견하여 양주(凉州)를 확보했습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부락(苻洛), 등강(鄧羌) 등을 파견하여 대(代 : 북위北魏의 전신)를 멸망시켰습니다. 또 이 사이인 373년 9월에는 촉(蜀)을 동진으로부터 획득하였습니다. 부견의 이런 정력적인 정복전쟁으로 전진은 376년에 화북을 통일하였습니다.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동방 사회에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전진은 379년에 동진의 거점인 양양(襄陽)을 함락시켜 한수까지 진출하며 동진하고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밖의 한반도의 고구려(高句麗)[1], 신라(新羅)[2]나 서남쪽의 청해(靑海) 지역에 있는 토욕혼(吐谷渾)[3] 등하고는 친분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화북을 통일한 이후 부견은 장군 여광(呂光)을 파견해서 구자(龜玆)와 언기(焉耆) 등 서역제국을 공략했습니다. 여광의 서역 공략으로 인해서 서역 36개국이 전진에 조공을 해왔는데 그 중에는 그 유명한 대완국(大宛國)의 한혈마(汗血馬)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견은 한 무제의 옛일을 생각하여 한혈마를 포함한 500종 이상의 진품을 모조로 되돌려주고 「지마시(止馬詩)」를 군신들에게 짓게 하여 욕심이 없음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비수대전(淝水大戰)이 일어나기 전까지 부견 통치 하의 전진은 사회는 안정되었고 인구는 2300만 명 전후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비수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전진은 매우 번영하여 안정되어 진서(晉書)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 영가의 난 후 학교라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부견이 제위에 오르자 유학에 크게 관심을 갖고 왕맹은 민심의 안정에 노력했다. 정치에 조리가 서고 학교는점차 융성하였다. 섬서성 일대는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수도 장안에서 여러 주에 이르기까지 도로 양쪽으로 모두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고 20화리(華里 : 약 1킬로미터)마다 정자, 40화리마다 역사(驛舍)를 만들어 여행자는 그곳에서 보급과 휴식을 취하고, 상인과 수공업자는 길에서 자유롭게 거래했다. 사람들은 이 태평성세를 가져온 군주를 찬영하며 노래하였다.
「장안 도읍의 큰 길은 버드나무와 회화나무 가로수가 뻗어 있고 붉은 수레가 달려가고 위로는 봉황님이 살고 계시는구나 훌륭한 분들이 우르르 몰려와 민초들을 이끌어 주시는구나」
[1] 삼국사기 18권 고국원왕 40년조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삼국사기 18권 소수림왕 2년조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2] 삼국사기 3권 나물이사금 26년조
위두(衛頭)를 부(부)씨의 진(秦)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부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卿)이 말하는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으니 어찌된 것인가?」
[위두가] 대답하였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3] 부견은 토욕혼의 왕 쇄해(碎奚)에게 안요장군(安遼將軍) 강천후(漒川候)의 지위를 주었다고 합니다.
※ 출처 :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중국중세사,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삼국사기,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