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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부탁이네. 원하는건 뭐든 해준다지 않나?
돈을 원하면 내가 내어주도록 하겠네.
필요한게 있다면 모두 가져가도 좋네.
그러니 이것 좀 풀어주게. 내겐 가족들이 있단 말일세.”
의자에 묶여있는 중년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에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얼굴.
놀라울 정도로 잘어울리는 안경과 순박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은 그의 흰피부와 조화롭게 이루어져 그를 상당한 미남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외형과 특유의 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남자는 청년이 갑자기 서재로 뛰어들어왔을 때에도 나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위협스럽게 칼을 들이밀고 나서야 이 청년이 집에 침입한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또 똑같은 소리시네요. 그럼 저도 똑같이 대답할게요.
필요한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원하는건 아저씨를 죽이는거죠.
그냥 그뿐이에요.”
섬뜩한 말에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 아직 늦지않았네.
자네에게도 아직 미래란게 있어. 밝은 미래 말일세!
내가 도와주겠네. 내가 이래뵈도 아주 능력있는 사람이야.
자네를 올바른길로 이끌어줄 수 있네. 내가 물심양면으로 돕겠네.
전부 되돌리고 새 출발 할 수 있어. 내게 기회를 주게!”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던 청년은 남자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하.. 올바른길이요? 밝은 미래?
재미있네요. 솔직히 슬슬 지루해져서 그냥죽일까 싶었는데 흥미가 생겼어요.
아저씨 말씀대로 기회를 한번 드릴게요.
보자.... 쇼핑간 아저씨 가족들이 돌아올때까진 대략 30분 정도 남았겠죠?”
그렇게 말한 청년은 남자에게 다가가 묶여있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뭔가 손목의 위치를 가늠하는듯한 청년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기도 전에
청년의 칼은 예고도 없이 남자의 안쪽 손목 깊숙이 파고들었다.
“오케이. 딱 좋네요. 이정도로 사정없이 피가 나오면 30분 안에 정신을 잃을거에요.
그 안에 저를 설득해 보세요.
성공하면 지혈해 드릴게요. 그럼 집에 돌아온 가족들이 병원에 데리고 가서 아저씨를 살릴거에요.
하지만 실패하면? 아저씨는 물론 아저씨 가족들도 전부 죽는거에요. 아시겠죠?”
남자는 대답 대신 크게 비명을 질러대었다.
“아니죠. 그럴시간 없어요. 어서 절 설득해보세요.”
청년의 말에 남자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억누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넨... 자넨 아직 젊네. 되돌릴 시간은 충분히 있어.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실수는 만회할 수 있네.
이런 끔찍한 일을 계속하다간 결국 자네를 전부 망가트리고 말게야.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선 안되네. 자네도 내심 후회를 하고 있지 않나?
다른 이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네.
아직 늦지 않았어!”
가만히 듣고 있던 청년은 후회란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후회요? 하하. 네 그렇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그때 정말 엄청나게 후회를 했거든요.
그때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그때 벽돌을 집어들지 않았더라면...
그 취객이 그대로 죽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남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 난 그 맘을 이해하네.
자네가 느꼈을 후회와 자네가 느꼈을 두려움. 그걸 모두 이해한단 말일세.
그걸 모두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겠나?”
“되돌린다라..... 그래요. 몇 번씩이나 바랬던 거죠.
전부 되돌리는거.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너무 무서웠거든요.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한동안 맘편히 자지도 못했어요.
당장이라도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칠거 같아서 무서웠고...
내가 죽인 그 사람 마지막 눈빛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무서웠고...
사람 머리를 깨버릴때의 그 감각은 이 손에 고스란히 남아서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술에 의지 했었죠.”
청년의 침울한 얼굴을 본 남자는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에 정신이 아찔해 짐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게 자네가 잘못된 길을 걷게된 계기였구만.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음을 옭죄어 오는 짐을 덜기위해 폭력적으로 변한거야.
‘난 원래 이렇게 거친 사람이다. 두려워 할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식으로 선한 본성을 외면한채 억지로 악마의 탈을 쓰게 된거지.
알겠나? 자네는 본디 선한 사람이네.
잠을 이루지 못할정도로 죄책감을 느꼈지 않나?
지금은 그저 상황이 좋지않았을뿐이지. 자네는....”
“근데요....”
열심히 말하던 남자는 웃음기 돋힌 청년의 갑작스런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순박한 인상이었지만 새삼 섬뜩한 분위기를 풍기며 청년이 말을 이었다.
“근데 이게 시간이 지나니까, 또 묘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뭐랄까... 엄청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막 고통스럽고 힘들면서도 좀있으면 또 먹게 되잖아요?
매운맛에 호되게 당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는 안먹겠다 다짐하지만
또 며칠후엔 은근히 입맛이 당긴단 말이죠.
그런 느낌인거에요. 두려움이랑 죄책감이 한차례 퍼붓고 나면 소소한 희열이 찾아오는거죠.
그리고 뭐 아시잖아요? 힘든건 처음 한번 뿐이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는 좀더 또렷하게 기억해요.
굴다리 밑에 있던 노숙자.
가뜩이나 돈없고 불안한데 짜증이 날 정도로 들러붙으면서 구걸을 하던....
그 사람 얼굴에 있던 점 숫자까지 또렷하게 기억해요.
그리고 어떻게 죽였는지도...
거짓말처럼 칼이 갈비뼈 사이로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가서 폐를 찔렀어요.
언젠가부터 뭔가에 홀린 듯 머릿속으로 수십번 시뮬레이션 했던 그대로 였죠.
단순히 호신용일 뿐이라 스스로를 속이며 품고 다니던 그 식칼로요.
칼이 사람 몸뚱이 속을 부드럽게 파고드는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손맛이 느껴졌어요.
칼을 통해 따뜻한 피가 제 손을 적셨고
목따인 돼지마냥 꺽꺽거리는 그 더러운 인간이 그저 평범한 고깃덩어리로 변하는 그 짧지않은 시간동안
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쾌락에 몸을 떨어야 했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듯 하자 남자는 다시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니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아니, 아니야. 그건 거짓된 감정이야.
죄책감 때문에 겪는 고통이 너무 커서 자기방어 기재로....”
“그럴수도 있죠.”
이번에도 남자의 말은 청년에 의해 가로막혔다.
“적어도 그때까진 아저씨 말대로 진짜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근데.... 지금은요? 지금도 제가 그럴거라 확신하실수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을까요?
그리고 또 제가 얼마나 그걸 즐길까요?
보세요. 첫 번째는 공포를 느꼈죠? 두 번째는 희열을 느꼈어요.
세 번째 부턴 감동했고 네 번째는 완전히 매료되었죠.
그 다음은 어땠을까요?
기쁨, 환희, 갈망, 열망, 갈구...
그 어떤 단어를 가져다 대도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없어요.
천천히 죽어가는 인간의 비참한 얼굴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고
피를 토하면 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비명이야말로 가장 듣기 좋은 음악인거죠.
단언하건데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한 인간이야말로 가장 좋은 구경거리에요.
자 그럼 이쯤에서 다시 물어볼게요.
이번엔 정말 잘 대답하셔야 할거에요.
아직도 제가 선한 사람처럼 보이나요?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거친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힘겹게 대답했다.
“마.. 맞아. 자넨 선한 사람이네. 잠시 나쁜길로 빠졌을 뿐이야.
말하지 않나. 내가 되돌릴 수 있네. 그러니 제발 살려주게!”
남자의 간절한 말에 청년은 금세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얘긴 아까 했잖아요.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렇게 영혼없는 소릴 반복하시다니...
흥미가 떨어졌네요. 어디보자 시간이....
오, 마침 시간도 끝나가네요. 그러니 슬슬 마무리 할게요.”
“아니, 아닐세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너무 늦었어요. 이제 아저씨 얘긴 재미가 없어요. 그냥... 실패한 거죠.
자, 아저씨는 설득에 실패하셨어요. 그럼 아까 약속 기억하시죠?
그럼 앞으로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간단하죠 뭐.
곧 도착할 아저씨 가족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죽어가는 아저씨를 볼수 있을거에요.
그리고 전 가족분들 손발을 단단히 묶어서 아저씨 옆에 던져놓을 생각이에요.
절대 탈출 못하도록.
아저씨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가 천천히 죽어버리겠죠.
저는 여기에서 그걸 느긋하게 지켜볼 거에요.
언제까지 보냐면..... 굶주린 아저씨 가족이 꾸물꾸물 기어가서 죽은 아저씨 시체를 뜯어먹는 그때까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 아주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을 지켜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악을쓰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남자의 몸에선 이미 힘이 전부 빠져나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아 그리고 한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게 있는데,
전 나쁜길로 빠진게 아니에요. 잘못된 선택을 한것도 아니고.
그냥.....”
그 순간 가족들이 돌아온 듯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청년은 전에 없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쳤다.
“그냥.... 드디어 완성된거죠.”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