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몹시 나른합니다. 불 붙은 모기향은 타오르고, 여름 햇살은 내리쬐고, 에어컨 대신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열린 창문과 커튼 사이로 바람이 살짝 붑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시끄럽습니다. 저렇게 방송 틀어놓고 다녀도 아무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그저 솜사탕 같은 휴식을 방해하는 소리에 짜증이 살짝 납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맞다. 밥솥. 밥솥도 사려나? 냉장고 위의 밥솥이 생각이 났습니다. 고장 난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먼지가 많이 쌓였지만, 지금 들고 가서 팔 수 있지 않을까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아저씨, 이거 밥솥도 취급하십니까?”
“예~ 한 번 줘 보세요~”
아저씨는 밥솥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이건 살 수 있겠네요.”
“얼마나 주실 수 있으세요?”
“잠시만요. 파실라고요?”
“네. 안 사세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손님. 밀양사람 아니지요?”
“네. 갑자기 왜요?”
“경상도 말에는 성조가 음운의 역할을 한다는 거. 너무 어려운 이야깁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경상도 말로는 삽니다와 삽니다는 다른 말입니다. 저는 밥솥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밥솥을 살리는 사람이지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사실 지금 나오는 이 방송도 원래는 내가 물건 좀 살라고 어디서 갖고 온 거기는 한데, 방송을 가마 들어보이 삽니다가 아니라 삽니다라 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살릴 수도 있지 카는 생각이 들어가 고치고 있지요.”
“아, 그러면 밥솥 안 사실 거에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살릴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거 살리면 쓰겠는데요.”
“벌써 밥솥을 새로 사놓은 게 있어서...”
“그래요? 그라믄 제가 살게요. 오천 원 드릴 수 있는데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네. 그러면 오천원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잠시만요. 혹시 고치는 데는 얼마에요?”
“그것도 오천원입니다~”
“혹시 고쳐주시겠어요?”
“네~ 이건 금방 끝납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여기 있습니다~ 요기 요 부품이 낡아가 새로 갈아 끼웠습니다. 잘 될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밥솥을 콘센트에 꽂아보니 불이 들어옵니다. 잘 고쳐진 것 같습니다. 두 대의 밥솥이 나란히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한 걸까요? 그냥 팔면 되는 거였는데. 왜 이걸 고쳐서 왔지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저 말이 마음에 쓰입니다. 솔직히 가전수리하는 사람 중에 저딴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하지만 살린다는 말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 같아서,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수리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아저씨가 이걸 노린 거라면 장사의 천재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여전히 낡았지만, 불이 들어오고 조금 깨끗해진 모습이, 왠지 오랜 친구가 다시 돌아온 기분입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다시 밥솥의 전원을 뽑아서, 선을 잘 말아 넣고, 비닐을 씌워서 냉장고 위에 올려둬야겠습니다. 결국 이럴 거였습니다. 괜한 짓을, 아. 맞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장 난 노트북도 들고 갈걸.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좀 멀긴 하지만 아직도 소리가 들립니다. 동네를 빙빙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들고 뛰어가면 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숨을 헐떡이며 트럭에 손짓합니다. 트럭에서 모자 쓴 아저씨가 내립니다. 어라?
“어이고, 열심히 뛰어오시네. 컴퓨터 파시려고요?”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안 파실 거에요?”
“아저씨 혼자 다니시는 거에요?”
“예. 그거 상태 좋으면 삼만 원은 드릴 수 있는데.”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이럴 수가. 아까와 다른 사람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착각했나봐요.”
“안 파시려고요? 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
아까 아저씨가 인터넷에서 방송 소리를 찾았다고 했으니 단순히 같은 소리를 쓰는 다른 사람인 걸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들리던 소리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밥솥이나 정리해야겠습니다.
고친 밥솥의 전원을 뽑으려다 자세를 고쳐 앉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모기향은 마지막 연기를 힘차게 내뿜고, 해는 산 위에 걸터앉았고, 선풍기는 여전히 돌아가고, 열린 창문과 커튼 사이로 부는 바람이 살짝 추운 기분이 들게 합니다.
“고장 난 냉장고 컴퓨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