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국에서도 이를 '하서주랑' 이라 하여 전한(前漢)시대에 장건의 서역파견을 시작으로 이후 반초의 서역정벌을 통해 한 왕조는 서역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동안 흉노를 비롯한 여러 서역 소수민족의 훼방으로 중국의 문턱도 밟지 못하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이를 계기로 중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처음으로 중국에 정착한 지역은 오늘날 중국의 서쪽지역인 신장위구르자치구나 감숙성과 같은 변두리 동네였습니다. 그러다 후한시대에 이르러 점차 낙양이나 장안과 같은 대도시는 물론 중원으로 진출해나가기 시작했고 이후 삼국시대 및 서진(西晉)시대까지도 중원으로의 유입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무렵부터는 이들 중앙아시아인을 지칭할 때에도 예전처럼 단순 서쪽 오랑캐들을 뜻하는 말인 호인(胡人)이란 단어말고 따로 갈호(羯胡)란 단어를 써 구별하기도 했습니다.
대개 이렇게 생긴 사람들..
그러나 이들이 중국 땅에서 산다고 해서 다 인정받아 백성으로 대우되었던 건 아니고 한족으로부터 차별받으며 하층민 취급 받았다라는게 함정인데 대개 한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요. 타지에서 생활하는라 빡시겠다, 차별받아 서럽겠다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꽃피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중국의 북부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윗 지도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듯이 병주(幷州)나 유주(幽州)와 같이 중국의 최북단 지역으로, 그 바로 위에 깨알같이 쓰인 선비족이나 오환족 등과 같이 북방 이민족들의 영역과는 맞닿아 있는 곳입니다.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이기에 예로부터 북에서 남하해오는 이민족들의 침입이나 유입이 잦았던 곳으로 이미 그 당시에도 이민족들이 꽤나 거주하여 민족성분이 복잡한 동네였습니다.
자신들처럼 같이 오랑캐 취급받는 쌍놈들이 득시글거리는 동네이다 보니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덜 멸시받게 되고 여러모로 친근함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이 '갈호' 들은 병주나 유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체로 이민족들에게는 억압책을 펼쳐오던 위(魏)를 계승한 서진(西晉)역시 그 노선을 따라 이민족들에 대한 대우나 취급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북방의 흉노족도 그렇거니와 특히 여기서 다루는 '갈호' 들은 요즘 말로 하면 납치 인신매매단을 운용하여 잡아들여서 노예로 삼았다고 하는데요, 그중 악명이 높은 인물은 당시 병주를 다스리던 병주자사 사마등이란 작자로, 그의 성씨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서진의 황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갈호 여자들이 당시 고위층 사이에서는 미인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백인들이라고 다 잘생기고 다 이쁜건 아닙니다만 자신들과는 다른 생김새의 백인여자들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무튼, 어느 관리가 병주나 유주의 자사로 부임한다고 하면 그 관리에게 갈호여자를 구해다 달라고 청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인기가 대단하긴 했는 모양입니다.
이렇듯 병주나 유주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갈호들 중에는 훗날 5호 16국 시대에 후조(後趙)를 세우는 석륵(石勒) 일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석륵은 한때 위에서 말한 사마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서진이 팔왕의 난이라는 내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탈출하여 중앙에서의 혼란을 틈타 당시 병주에 할거해있던 반란군 무리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자신의 재능을 적극 활용하여 나중에는 한 군벌을 이루게 됩니다.
석륵.
서진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영가의 난을 초래한 흉노족의 왕조인 한(漢)에 임관하여 서진을 두들겨 패던 석륵은 서기 311년에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함으로서 그 종지부를 찍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이때 낙양이 함락되자 당시 낙양에 있던 갈호 상인들은 자신의 동족인 석륵을 따르지 않고 모두 도주했다라는 점인데요, 동족마저 학을 떼게 만든 석륵의 잔인함도 나름 작용했겠지만 아무래도 노예로 전락한 대다수의 갈호들과는 달리 낙양에 거주하던 갈호들은 이미 재력을 쌓은 상인들로, 자신의 실리와 이익이 더 중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석륵의 낙양 함락을 까는 글을 남긴 점으로도 미루어 볼때도 그렇고요.
아무튼, 서진을 쫑낸 석륵은 얼마 후 후조(後趙)를 개창하여 한때 자신이 몸담고 있던 흉노의 한(漢), 즉 전조(前趙)와 서진멸망 이후 공백지가 된 중원에서의 패권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곧 최종적으로 승리자로 등극합니다.
당시 정세도.
중국사에 여러 이민족 왕조가 있다라지만 중앙아시아계의 유목민들이 세운 후조는 백인종들을 주축으로 한다는 점에서 꽤나 독특한 왕조인듯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후조를 찬찬히 살펴보면 흥미롭고 독특한 부분들이 있는데요, 대표적인게 죵교가 아닐까 합니다. 이 당시 후조황실에서는 배화교(조로아스터교라고도 하지요)와 같은 외래종교가 유행했고 또한 국교로 삼아질만큼 대성행했다고 합니다. 특히나 그 예로 '호천(胡天)'이란 신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에서 이 호천이란 신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로아스터교의 주신인 '아후라마즈다' 라는 썰도 존재하고요.
수많은 나라들이 우후죽순 일어나고 지던 5호 16국 시대 특성답게 후조 역시 석륵의 죽음을 이후로 차차 몰락기에 접어들게 되고 나중에는 염민이라하는 한족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요. 염민은 갈호들을 어찌나 혐오했는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큰놈들은 모두 갈호들이니 모조리 죽여없애라' 라는 명을 내려 이때의 대학살로 갈호들은 거의 씨가 마르게 됩니다.
그나마 살아남은 갈호들은 한때 자신들의 종족이 최초로 정착했던 감숙성이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일대로 도주하여 살아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오랜세월을 거치며 오늘날에는 갈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해도 무방합니다. 다만 저 동네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그나마 갈호의 혈통을 물려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