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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공부를 하던 때.
꽤 흥미로운 영어 지문을 읽은 것이 기억난다.
그 지문의 첫 마디는
'당신은 상추한테도 화를 냅니까?'였다.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 문구에,
나는 상추가 영어로 뭔지도 모른채
호기심에 이끌려 답안지의 해석을 읽어봤다.
지문의 골자는 이랬다.
상추가 잘 자라지 않는다고
당신의 상추에게 쓸모없이 화를 내지 않듯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당신이 지금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화를 내는 것이,
그저 쓸모 없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영어 지문은 화에 대한 무용을,
그리고 최소한,
자주 화를 내어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지 말자
고 주장했다.
그 지문을 읽은 나로부터
벌써 십몇년이 지났지만,
가끔씩 그 지문이 문득 떠오른다.
상추에 대고 잘 자라지 않는다고
소리질러대는 남성이 머릿속에 떠올라
웃겨서도 그랬지만,
상추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는
그 발상과 언어유희가 마음에 들어서도 그랬다.
닐 게이먼의 소설 '멋진 징조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소설은
착해진 악마와 세속적인 천사가
세상에 태어난 적그리스도가 벌이는
종말의 날을 막으려 고군분투 하는 내용이다.
악마와 천사는 모두 이 세상을 좋아하며
그저 점심에 즐기는
스테이크와 와인 한잔이 좋아 종말을 막는데,
그중 악마는 화초 키우는 걸 좋아하는 친구다.
이 친구가 키우는 화초들은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꽂을 피우거나
가장 높게 아름답게 성장하기로 유명한데
그 비결은 웃기게도
화초에게 분노하고
공포를 심어주어
더 아름답게 자라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악마의 독기 서린 뱀 혓바닥으로 내뱉은
그 분노와 공포로 화초들은 부들부들 떨며
더 아름답고 더 크게 성장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못미치는 화초들도 분명 있어서
악마는 그런 화초들을 방 안으로 들고갔는데,
그럴때마다 소름끼치는 믹서기 소리가
방 밖까지 울려퍼졌다.
물론 마음 약한 악마는
믹서기만 크게 틀어놓고
화초들을 아랫집 할머니에게
선물하러 간 것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이건 닐 게이먼의 시니컬한 판타지니까
그럴 것이고
어떻게 화초가 욕을 한다고
화를 낸다고
협박을 한다고 더 아름답게 성장하겠는가.
그런데 웃기게도
되돌아 보자면 우리도
이 착한 건지 못된 건지 모르겠는 악마처럼
화초에 대고 화를 낸 적이 한 번씩은 있다.
바로 칭찬 양파 실험이다.
물론 이 양파 실험에 대한 과학적 입증에 대해선
우리 모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리고 다들 한번씩
이 실험이 제대로 된 실험인지 검색들 해보겠지.
하지만 실험의 과학적 검증을 제쳐두고서라도
당신이 이 글을 읽고
나중에 화를 내기 전,
상추를 문득 떠올리고 이 재미없는 글을 떠올려
그래 씨발 화내서 뭐하겠나
라고 생각해
화내기를 그만두고 맛난 치킨이나 뜯으러 간다면
그것만이라도 이 글은
성공한 셈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