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일본의 무신정권 성립
고려의 무신정권
고려시대 때인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이며, 당시 실세는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진다. 무인들이 봉기한 직접적인 계기는 문신과 무신에 대한 조정의 차별대우와 고려국왕 의종의 행동에 있었다. 의종은 사치와 유흥에 빠져있었으며 토목공사나 불교의식에 열중하였다. 당연히 그것에 동원되었던 하급의 무인이나 군인, 인부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와 더불어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결국 1170년 정중부 등의 무신들은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기는 틈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의방, 정중부, 이고 등의 무신은 다수의 문신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명종(明宗)을 옹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경인(庚寅)의 난이다. 국왕을 교체하고 문신들을 폐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그 후 그들만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의방은 이고를 제거하고 최초의 권력의 주도권을 잡고 딸을 태자비로 삼아 권세를 휘둘렀다. 1174년 정중부는 이의방을 살해하고 사병을 모아서 토지를 겸병하였다. 그러나 정중부도 5년후 경대승에게 살해되고 경대승은 도방을 설치하여 사병집단을 조직하였다.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온 이의민이 관료의 인사를 장악하고 정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의민 정권도 안정되지 못하여 1196년 최충헌에 의해 이의민은 처형되었다. 최충헌은 유학자와 문인들을, 그 소양이나 행정적,문화적 능력을 기초로 평가하여 사저에 모았다. 그리고 사병조직인 도방을 확대하고 수만명의 사병을 모았다. 1209년에 교정도감(敎定都監)이 설치되어 최충헌은 그 수장인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었다. 이것으로 무신정권의 함법성이 인정되었으며 교정별감은 무인의 수장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후 교정별감직은 최우(崔瑀), 최항(崔沆), 최의(崔誼)에게로 세습되었다. 이로써 최씨정권이 성립된 뒤에야 무신정권은 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의 무신정권 [헤이시(平氏)정권과 가마쿠라(鎌倉) 막부]
중세 일본의 특징은 무사가 대두하여 무가정권(武家政權)을 수립하였다는 점에 있는데, 그 기선을 잡은 것이 헤이시(平氏) 정권이다. 보원(保元)의 난(1156)과 평치(平治)의 난에서 승리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 평청성)는 고시라카와(後白河 후백하)상황의 원정(院政)하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그리고 1179년 군사력을 배경으로 고시라카와 상황을 유폐하여 원정을 중단시키고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세력의 반발을 낳았다. 1180년 모치히토 왕(以仁王)과 미나모토 요리마사(源頼政)가 일으킨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를 정통성의 근거로 삼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와 미나모토 요시나카(源義仲)가 거병하여 지쇼(治承),주에이(壽永)의 내란이 본격화 되었다. 그 내란의 승자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수립한 가마쿠라(鎌倉) 막부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서 동국(東國)의 행정권을 인정받아 군사권문(軍事權門)으로 출발하였다.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고리시라카와 상황에게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직책을 임명받아 동국 무사의 통솔권을 인정받게 되었고, 이에따라 고려에 이어 일본의 원씨(源氏) 무가정권도 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고려와 일본의 무신정권 비교
헤이시 정권과 고려의 무신정권
우선 헤이시정권과 무신정권은 다음과 같은 유사점이 있다. 헤이시 정권과 고려의 무신정권 모두 수도인 교토와 개경에서 정권을 획득하였으며, 고시라카와 상황을 유폐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독재체제를 구축한 헤이시 정권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무신정권도 왕이나 문인들을 살해하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하였다. 헤이시 정권이 다카쿠라(高倉) 천황을 안토쿠(安德)천황으로 교체한 것과 최충헌이 국왕을 교체한 것도 양자간의 공통점이다.
다음으로 양자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다이라노 기요모리를 비롯해서 조정이 동원하였던 교무샤들은 자신의 로주(郞從)등 사병집단을 인솔하여 반란을 제압하였다. 당시의 일본의 조정은 교무샤가 보유한 사적인 군사력을 불러 모아서 국가적 군사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고려의 경우는 무반의 일족이나 농민중에서 징발된 병사로 구성되었던 국군이 국가적 군사력의 담당자였다. 이점은 일본과 크게 다르지만, 무신정권하에서 유력한 무인이 사병을 양성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는 점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가마쿠라 막부와 고려의 무신정권
가마쿠라 막부와 고려의 무신정권의 공통점은 양자가 모두 국가의 군사제도를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가마쿠라 막부의 수장인 가마쿠라도노는 동국의 무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관직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고려 무신정권의 수장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라고 불렸는데 양자 모두 국왕이 임명함으로써 정통성을 지닌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양자간의 차이점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수도 교토에서 떨어진 동국(東國)에 수립된 가마쿠라 막부는 그 수장인 가마쿠라도노와 주종관계를 맺은 고케닌(御家人)에 의해 구성되었다. 가마쿠라도노는 고케닌의 토지(所領쇼료)를 안도하거나 새롭게 지급함으로써 고케닌을 지배하였다. 즉 토지를 권력기반에 편입하여 고케닌을 지배하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의 무신정권은 수도를 거점으로 하였으며 국왕과 문신들이 만들어낸 기존의 국가조직안에서 패권을 획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와 비교해 볼 때 재지성(在地性)은 약하며 토지를 매개로 사병을 조직하는 제도는 정비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과 고려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신분의식이었다. 카마쿠라막부의 경우 고케닌을 통솔한 가마쿠라도노는 고귀한 혈통이 아니면 될 수 없었다. 3대 장군인 미나모토 사네토모(源實朝)가 암살당하여 세이와겐지(淸和源氏)의 혈통이 끊어진 후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인 신노(親王)를 가마쿠라도노로 맞이 하였다. 당시 실제로 막부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외척세력인 호조씨(北條氏)였지만 세이와겐지의 혈통이 아니었기에 가마쿠라도노의 지위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에 반하여 고려의 무신정권을 담당한 무인들을 보면 이의민은 노비 출신이었으며 최충헌은 상장군의 아들로 결코 높은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려는 일본에 비하여 계층의 유동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가마쿠라 막부와 고려의 무신정권 차이의 원인
그렇다면 일본 무가정권 내의 무사들의 재지성(在地性)과 신분의식면에서 고려의 무신정권과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헤이안(平安) 후기에 등장한 일본의 무사(武士)라는 계층과 고려의 무인(武人)이라는 계층의 성격차이 때문일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일본의 무사(武士)라는 계층을 고려나 중국같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무인(武人)계층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두 집단의 정의와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일본의 무사라는 계층은 헤이안 후기 율령제가 약화되고 공지공민제의 붕괴와 더불어 장원이 성립되면서 이를 지키기 위해 개발영주로 불리던 장원의 소유자들이 무장화하기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과 더불어 무력을 직업으로 하는 무사단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조정은 이런 무사단을 마치 용병처럼 고용하면서 지방의 분쟁 해결이나 치안유지에 이용했던 것이다. 헤이안시대 왕조국가 체제는 조정 행정기구의 업무가 국가의 율령제 안에서 양성된 관리에게서 그 일을 대대로 업으로 삼은 실무관리의 집안에 위탁해 나갔던 시기였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무예를 업으로 삼은 가문에게 치안과 지역분쟁 개입을 위탁하였던 것이 무사단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 고려의 무인계층은 중국이나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무장한 관리의 성격을 지닌 기존 국가조직 내에서 훈련된 상근공무원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의 침입이 없는 섬나라 일본이야 무력분쟁이라면 지방 영주들의 토지싸움 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북방 침입의 위혐을 받는 고려의 경우 국가적으로 군사 총동원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의 무인계층과 일본의 무사단의 차이점은 결국 국가 체제내에서 정비된 조직과 무예를 업으로 삼은 특수한 신분계층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무사란 무예를 업으로 삼은 가문이기에 그 직위는 세습적이며 재지성 면에서 고려의 무인계층보다 더 확고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무인계층 역시 국가조직내의 관리라는 점에서 일본의 무사계층보다 계층의 유동성이 활발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