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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병도학파라쓰고 일파라읽는다.공고하군요
게시물ID : history_152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ei
추천 : 5/9
조회수 : 771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4/04/09 21:39:55
최태영박사님이 이병도보다 그의후학들에게 큰분노을 느낀다 하셨던 이유일까요

이병도가 친일파인건 불변이고
(그 이유만으로도 능지처참해야하지만)

그가 왜 식민사관의 태두인지 슬슬 이야기 해볼까요

참고로 저는 외국에 살기때문에 시차가 12시간 차이납니다

일단 붙여넣기 한번합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식민사관....이병도 사관.








식민사관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항일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황국사관에 따라 창조한 한국사 왜곡 이데올로기다. 타민족에 대한 침략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기 때문에 식민사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창조한 천황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의 역사관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일본은 엄연한 천황제 국가다. 독도 문제, 자학사관 극복을 위한 교과서 개정, 일본군 성노예 문제, 강제징용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경제 대국인 일본이 인류사회의 보편적 이상과 양립하지 못하는 한계도 여기에서 나온다.








일본 우익들은 아직도 역사를 조작한다. 일본은 당대 최고의 학자나 ㅡ지식인들을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을 임의로 조작하거나 왜곡하면서 역사를 서술했다. 그러면서 이를 실증사학이라고 강변했다. 이 전통이 한국 역사학계에 그대로 전수되었다.“한국은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식민사관은 ‘지배’라는 침략주의, 즉, 타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말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식민사관 양대 기둥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다. 이 두 가지는 이름만 달랐지 같은 내용을 가진 양면이다. 
 




일제 식민사관은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양쪽 기둥으로 세운다. 한국사는 중국과 몽골, 만주와 일본의 지배와 영향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돼왔다는 것이 타율성론의 골자다. 이 이론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제의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발명된 것으로서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단군조선 말살, 한사군 한반도 정착설,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 모든 건국 사화(史話)의 역사성 부정,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만선사관, 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당파성론, 내선일체, 창씨개명 등이 모두 한국사 타율성론에서 나온 허구적인 논리들이다.








한국은 근 천 년 동안 사회적·경제적으로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는 것, 20세기 초 한국은 10세기 말 일본 고대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정체성론이다. 이 논리는 단순히 한국의 사회적·경제적 낙후성을 왜곡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이 또한 일본 지배의 필연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침략논리다. 정체성을 극복하게 해주었으니 한국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 정체성론의 골자다. 한마디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의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데, 현재도 한국 내 극우파들에 의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 땅을 점령하고 보니 통치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단군에서 시작하는 자국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백제 등이 일본에 문화를 전파해주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국사를 식민지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변조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서술하기 시작했다. 이런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이후 조선사 편찬 계획을 세워 준비해오다가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조선총독부 직할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구로이타 가쓰미 등의 일제 어용학자들이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구로이타 가쓰미는 황국사관의 기초를 다져 침략 논리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쓰다 소키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기초를 세웠고, 이마니시 류와 함께 고대 조선과 단군 기록을 샅샅이 강탈해 없애버린 인물이다. 여기서 이병도는 고려 이전의 고대사 연구를 맡았다. 조선총독부가 침략을 합리화하고 한국사를 말살하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고대사다. 한국사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중국 식민정권인 한사군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는 논리를 세웠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병도가 식민사학의 전사로 나서며 한국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이병도(이완용의 조카)는 고대사 중에서도 한사군의 위치와 삼한 문제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군조선의 독자성을 부인하고 한국사는 중국 식민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서술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만주로 봤지만, 그는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식민정권인 한사군 이전의 고조선 역사를 미개사회로 규정했다.




신채호, 정인보 등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견해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주장이었다. 이병도의 학설은 한마디로 조선사편수회 학설의 복사판이었다. 일본은 합병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한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사》를 편찬한다고 조선총독부는 분명하게 밝혔다. 현재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식민사학을 정설로 떠받들고 있다. 그 원조인 이병도는 해방 직후 너무나 현저했던 친일행적 때문에 위기에 몰렸지만,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하면서 되살아났다.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한국사의 태두로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사의 태두라는 이병도는 광복 후에도 일본 극우단체의 황국신민 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했다. 일제 침략을 반대했거나 친일 행위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위이다. 또한 그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들을 그 곳에 보내는 역할도 주도했다. 이병도는 광복 전이나 광복 후에도 극우 일본인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극우 숭일(崇日) 행적을 단 한 번도 뉘우치지 않고 평생을 산 셈이다. 그런 자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 장관, 학술원 원장, 국토통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고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 민족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이병도의 한 손자가 21세기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고, 그의 동생은 문화재청장을 지냈으며, 이완용의 손자인 이윤형은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재산 반환 소송에서 승소한 바 있다. 이런 세상을 지금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역사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병도에게 우리 역사의 실체를 인정하고, 죽기 전에 죄과를 씻으라고 끈질지게 노력한 최태영은 이병도보다 그의 제자들에게 더 분통을 터트렸다. 그들은 끊임없이 복제하면서 제2의 이병도, 제3의 이병도로 퍼져 나가 한국 역사학계의 지배 권력을 향유하면서, 스승을 능가하는 식민사관 청출어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이병도 사관’이다. 이른바 ‘이병도 사단’은 한국사를 마음껏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역사 권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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