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1월 26일 매일신보.
출진학도에게 보내는 말
학도 출진의 대명을 받들고 특별지원병으로서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는 광영의 길이 열린 것은
반도학도로서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감격을 길이 빛내어 순충보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여
전통적 상무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도의 여성은 이것을 계기로 더욱 상무적인 교양에 힘써
군국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 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기회에 출진하는 학도와 우리의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사학계 선배 이병도씨로부터 옛 조선 신라 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에 대한 말을 듣기로 한다.
어머니의 굳센 격려, 전투 용기를 백배나 더하게 한다.
우리는 이조 5백년의 그릇된 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약에 빠지고 인습적 가족제도의 폐단인 남존여비 사상과 계족(系族)을 중심으로 한 도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상무정신과 충군애국의 사상이 희박한 결함이 있으니
이것은 단순히 일시 역사적 폐단에 지나지 않고 전통적으로 조선민족이 문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를 신라의 화랑에서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화랑은 원시신앙에 기원한 신라의 고유한 도이다.
원래 신라에서는 육체미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은 영육일체 사상,
즉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희랍 사상과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화랑은 처음에는 원화라고 하여 아름다운 여성을 택하여 단장을 삼았는데
남모와 준정이라는 대표적 단장이 시기하는 마음에서 질투가 일어나 서로 싸우다가
둘 다 죽어버린 후에는 이에 폐해가 있다고 해서 남성이 대신하게 되었으나
역시 나이어린 아름다운 사내 특히 귀족계급에서 택하였다.
나이어린 소년을 단장으로 택한 까닭은 혈기 왕성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청소년이어야만
의용심을 기를 수 있다는 데 그 연유가 있었고
그 인물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행위가 방장하여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즉 영과 육의 일체를 주장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화랑은 평소부터 도의 정신이 맺어져서도 의에 살고 죽으며 가악을 숭상하였다.
이것은 정서도야를 의미한다 또 명산대천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육체단련과 순례의 의미가 있다.
산에 들어가서 국가의 번창과 일가의 흥륭을 기도하며
천금이라도 의가 아니면 받지 않는 고결한 기품으로 대자연 속에서 연마 양성한다는 뜻을 가졌다.
전시에는 단체를 이끌고 출정하여 생명을 鴻毛와 같이 가볍게 버리며,
의를 태산과 같이 중히 여기었다.
즉 화랑은 전장에 나아가 패하게 되면 마땅히 죽을 것으로 알았고
죽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 돌아옴을 무엇보다 남자의 수치로 여겼다.
그런 예를 하나 들면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 백제와 황산에서 싸우다가
전운이 불리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 백제 장군계백이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니 후안의 미소년이었다.
가련한 생각을 금치 못하여 적의 장군은 그 소년을 죽이지 않고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출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그리고 근자에 경주에서
壬申二年六月十六日 二人 ×× 記天前書(이하줄임)
이라는 돌에 새긴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이 글의 문맥을 따져본다면 임신2년 6월 13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忠道를 닦아서 과실이 없기를 맹세하여
만일 이 맹세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죄를 얻으리라고 하였고,
또 만일 국가에 불안하고 대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충도를 행하여 국난을 막기를 맹세한 것이다.
학도 출진의 동원령 아래 장차 결전장으로 나아가게 될 반도의 학도들에게는
한층 더 감명 깊은 문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상무정신과 도의심은 화랑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의 시대정신이 일체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승려계급에도 이러한 도의정신과 상무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런 예를 들면 원광법사라는 유불에 통한 중은 세속오계라 하여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
을 가장 큰 교훈으로 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이 교육을 받은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청년은 신라가 백제와 싸울 때 출진하여 법사의 교훈,
임전무퇴의 훈계를 지키기로 하고 만신에 창검을 받고도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에 국가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열혈청년이 어찌 그 두 청년뿐이랴.
그리고 일반 남자뿐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상무적인 시대정신이 농후하다.
김유신 장군이 16세 때 미소년의 화랑으로 무예를 닦기 게을리 하고
화류의 거리에 출입하다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뒤에 큰 공을 이룬 것은
그 어머니의 훌륭한 상무적 교양에 의한 것이며
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더불어 대방의 들에서 싸우다가 패하고 죽으려하다가
부하의 만류 때문에 죽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 유신장군은 국왕께 왕명을 욕되게 하였고
또 가훈을 저버렸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상소하였고,
국왕의 사죄로 말미암아 시골로 가서 파묻혀 있다가
아버지가 별세한 뒤에 어머니께 뵙기를 청하였으나
그 어머니는 원술로 말하면
아비에게 자식노릇 못하였으니 나도 그 어미가 될 수 없다고
대면하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얼마나 화랑의 어머니가 아들교육에 엄격했던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1943. 11. 26)
[출처]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작성자 돈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