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취미로 조금씩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요. 어설프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피아노 건반을 눌러 음악을 만들어내는 시간이 있으니 삶에 활력소를 얻습니다. 갱년기 남성이라 그런지 더욱 피아노에게 고맙네요. 그런 마음을 담아 '피아노를 만나는 온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 편 써 보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 투성이라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지만, 한가하실 때 재미삼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글은 제가 모 매체에도 기고했는데, 출처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1053
<피아노를 만나는 온도>
<1> 0℃
내가 피아노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였을까? 알다시피 인간의 기억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 데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일이니,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객관적 증거다. 마침 임승수라는 인물과 관련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이상의 사료 가치가 있는 초등학교 일기장이 남아있어 면밀하게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발굴한 기록이다.
1981년 8월 4일 화요일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부모님이 피아노 학원에 보낸 이유는 교육적인 목적이 컸다. 내가 워낙 산만했는데 피아노를 배우면 집중력이 향상되지 않을까 싶었을 테고, 양손을 고루고루 사용해서 두뇌 발달에 좋다니 또 거기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는 취미로도 즐길 수 있으니 풍류 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에도 좋고.
일기를 쓴 당사자로서 고백하자면, 본문의 ‘참 재미있었다’는 명백한 거짓이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한시도 가만히 못 있고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사소한 것에도 웃음보가 터지는 호기심 덩어리에게, 다소곳이 앉아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피아노 연습은 좀이 쑤시고 주리가 틀리는 일이었다. 건반을 눌렀을 때 흘러나오는 음향이 ‘별높’ ‘글높’ 딱지놀이보다 흥미로웠다면야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정이 그러한데 왜 ‘참 재미있었다’라는 문장을 썼을까? 알다시피 예나 지금이나 초등학생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 일기장은 교사와 부모의 공유재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라지만 초등 1학년이면 대체로 2,000일 이상을 살아온 셈인데, 그 정도 눈칫밥이면 일기장에 본심을 적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안다. ‘참 재미있었다’라는 구절은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 처세술의 결과다. 직장인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회사 생활 괜찮아요’고, 소개팅 후기라면 ‘상대분이 착하신 것 같아요’ 정도의 느낌이겠지.
<2> 99℃
아무튼 첫 만남 이후 우리는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과연 상대를 만난 적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피아노는 내 인생에서 자취를 감출 것 같았건만, 1985년 6월 4일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역시 초등 5학년의 일기에는 상병 말호봉의 관록이 있다. 각 잡힌 모포 같은 1학년 일기와는 다르게 글씨체에 여유가 있고, 누가 보든지 말든지 쓸 건 쓴다는 되바라짐도 엿보인다. 이 길지 않은 일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우선 피아노 학원을 다시 다니게 된 구체적 날짜다. ‘어제부터’이니 1985년 6월 3일이다. 교재는 예상대로 바이엘 상권으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아이들이 못 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형들도 많았다.’
이 구절은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5학년이 되어 뒤늦게 피아노를 배운다. 어릴 때부터 배운 또래들은 나보다 훨씬 잘 친다. 초등 1학년이나 치는 바이엘 상권으로 쩔쩔매면 모양 빠진다 싶다. 하지만 바이엘 상권 치는 형님들을 발견하고 급속도로 안심이다. 내 밑으로 깔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마음이 편한 게지. 역시 빈곤도, 쪽팔림도 언제나 그 기준은 상대적이다.
주산 학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내용도 있다. 그래, 생각난다. 멀쩡한 전자계산기가 있는데 왜 청동기 시대 유물 같은 도구로 계산을 하나 싶었고, 주판으로 정수리 부분에 가해지는 드르륵 긁는 형태의 체벌도 고통스러웠다. 초등학생에게 도구를 이용한 고문이라니!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참으로 야만의 시대였다.
어쨌든 1985년 6월 3일의 등원은 의미가 남달랐다. 내가 먼저 피아노 학원에 다니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갑작스레 얘가 무슨 일인가 싶었단다. 솔직히 동기부여가 된 구체적인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5학년이나 된 머슴아가 바이엘 상권부터 치는 거시기함을 무릅쓸 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피아노에 진심인 것이다. 당시 나는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는 향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향상심 덕분인지 진도는 다소 빠른 편이었다. 그렇다고 재능 운운할 상황은 아니었다. 악기는 조기교육이 중요한데, 이제야 바이엘 상권을 시작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말문이 트이듯 음악의 단어, 문장, 어법에 익숙해지면서 갈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는 음악을 들으면 목 뒤쪽으로 전기가 오르는 듯한 짜릿함이 느껴지고 감정적으로 고양되는데, 그 육체적 정신적 변화가 무척 신기했다. 만화책, 공기놀이, 딱지치기, 땅따먹기로는 느낄 수 없는 기묘한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잘 계획되고 조직된 외부 소리 자극에 의해 야기된 뇌 속 도파민 분비 증가 때문이라고 이해하겠지만 말이다.
꾸준히 학원에 다니고 실력이 향상되면서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늘어났고,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욕망 하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창작욕. 내가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의 음악을 듣고 짜릿함을 느끼듯이, 누군가가 내 곡을 듣고 격렬한 도파민 분비로 인한 전율과 감동을 체험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최고였다. 그때부터 그럴싸한 선율이 떠오르면 악보에 적어놓게 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사춘기의 영향인지 창작욕은 더욱 비대해졌다.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를 음표로 남기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마침 어버이날 맞이 교내 작곡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에 곡을 출품해 금상(최고상)을 탔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학교 대표로 1988년 제물포 예술제 전국음악경연대회 작곡 부문에 참가했다. 대회 현장에서는 ‘뱃노래’라는 시가 가사로 주어졌는데, 제한 시간 안에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를 작곡해 제출해야 했다. 나는 마치 닳고 닳은 취업준비생인 양 출제자 의도 파악에 들어갔다.
‘도대체 심사위원들이 왜 뱃노래라는 시를 제시했을까? 보아하니 이탈리아 베네치아 뱃놀이는 아니고 우리나라 어부 얘긴데, 그렇다면 서양 7음계가 아니라 전통 5음계로 가는 게 맞겠지. 뱃사공들이 파도를 타고 넘실넘실 노 젓는 모습을 멜로디로 형상화할 필요가 있겠어. 피아노 반주는 국악 장단을 살리자. 덩기덕쿵덕,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나름의 분석을 마친 후 순식간에 16마디의 멜로디를 쓰고 피아노 반주를 만들었다. 참가자 중 제일 먼저 곡을 제출하고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오래전 일이라 가사와 피아노 반주는 기억 안 나지만 어쩐지 멜로디만은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래 악보가 그 뱃노래다.
대회 장소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어머니에게 “아마 대상 탈 거예요”라고 말했다. 주최 측의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곡을 썼다는 확신에서였다. 그런 내 판단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는데, 나중에 대상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물론 그런 오만방자한 얘기는 부모님한테만 했지만, 어쨌든 당시의 나는 중학생치고는 꽤나 당돌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부모님도 방관할 수만은 없어서, 부모와 자녀가 의기투합해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기에 이른다. 수소문 끝에 작곡가 선생님을 소개받아 기초적인 화성법을 배우며 4성부 베이스, 소프라노 문제를 풀곤 했는데, 이게 의외로 수학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수학 문제 푸는 걸 좋아하는 나의 취향과 잘 맞았다. 소품을 작곡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품평을 들을 때마다 작곡가라는 목적지에 한 발짝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구체적으로 준비할수록 새로운 고민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경쟁자들보다 늦게 시작해서 피아노 실력이 부족한 부분도 신경 쓰였지만, 설사 성공적으로 예고에 진학한다손 치더라도 너무 이른 나이에 진로가 결정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죽고 못 살 것처럼 좋아서 20대 초반에 결혼했다가 몇 년 후 원수지간이 되어 갈라서는 일 말이다. 막상 예고에 진학했는데 나중에 다른 분야가 더 좋아지면? 그것도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겠다 싶었다. 결국 고민하다가 예고 입시 준비를 접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1985년 6월 3일 이후 음악 열정 온도가 급상승했으나 비등점인 100℃에 이르지는 못하고 99℃에서 훅 꺾인 셈이다.
<3> 36.5℃
어느덧 시간은 흘러 1993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향후 전망이 좋다길래 별생각 없이 전자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간혹 집에서 피아노를 뚱땅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그 횟수가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피아노와는 멀어졌다. 어느덧 학사∙석사 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취직도 했다. 남은 인생은 직장인으로 무탈하게 살면 되겠건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예측대로 흘러가던가. 대학 시절 마르크스 <자본론>을 접한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전공이고 연구원 생활이고 다 때려치우고 마르크스주의 책 쓰는 사회과학 작가로 전향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건데,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좌파 사회과학 작가다 보니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정치적으로 극소수파다. 그리하여 DNA를 후대에 남기는 일 따위는 반쯤 포기했는데,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좋게 본 고마운 처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2010년에는 첫째 딸이 태어났다. 초음파 사진으로 태내 아이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도둑질이라고 해야겠구나’라는 강렬한 정서가 북받쳐 올랐다. 그래! 멋진 아빠가 되어야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았다. 내 아버지나 내 남편이 아니라면 굳이 눈여겨보지 않을, 그런 외모의 사내가 서 있었다. 음, 이걸로는 어렵겠는걸? 그때 문득 피아노가 떠올랐다. 아이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아빠? 제법 근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2010년부터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작가라는 직업은 피아노 치는 아빠의 모습을 연마하는 데에 썩 안성맞춤이다. 사실상 반백수라 설거지, 청소에 아이 공부 좀 봐주고도 시간이 남아 틈틈이 피아노 연습이 가능하다. 이제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는 의욕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그렇다고 꼭 무언가를 100℃의 기세로 좋아할 이유는 없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적절한 온도와 거리 유지가 중요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만의 페이스, 대략 36.5℃의 뜨뜻미지근함으로 10년 넘게 피아노를 치고 있다. 물론 이 나태하고 나른한 페이스로는 향후 10년을 더 치더라도 평범한 대학 전공생 수준에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그동안 이렇게 연습한 결과 2010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잘 치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누가 뭐라든 나만의 속도로 멋진 아빠가 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아니한가. 나의 손가락은 오늘도 두 딸의 (아래와 같은) 진심어린 응원에 힘입어 오늘도 건반 위를 누빈다.
“아빠! 시끄러워. 좀 그만 치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