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에 날치기를 통해 삼선개헌을 해낸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점점 심해집니다
김지하가 재벌,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을 비판했다고 반공법으로 잡혀갈 정도...
그리고 그 잘난 개발독재의 어두운 면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경제발전에 필요한 게 뭐죠?
자본, 그리고 노동력입니다
침략전쟁에 장병들을 팔고, 치욕스러운 식민지 시절을 팔아넘긴 대가로 자본은 얻었고
노동력은...로동당을 주적으로 둔 군이 정권을 잡고 있으니..
총칼을 들고 국민들에게 죽도록 일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누구도 그에 대해 큰 반발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위에 로동당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이란 말 자체가 금기어다시피 했으니까요
1970년 11월 13일
한 청년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평범하게 가난한 당시의 한국 가정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일을 하게 됩니다
14시간을 일하면서 50원을 받았답니다
당시로서도 커피 한 잔 값이었습니다
20살 무렵에 쓴 쪽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내일부터 23일까지 금식이다. 설마 3일 금식에야 죽지 않겠지.
정신수양의 금식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당장 그저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던 것이 노동자들의 처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한 이 법조차도 한문투성이..노동자들을 읽을 수조차 없었죠
해설서까지 사서 공부를 한 그는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법이 있는데도 왜 다들 바보처럼 살아왔을까'
그리고 법의 힘을 빌리기 위해 실제적인 노동환경 조사를 했습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 평균 근무시간 14시간
평균입니다, 사흘씩 잠을 못 자는 경우도 있었고, 잠을 못 자게 하려고 약을 먹이고 주사를 놓는 경우도 허다했다죠
초중생 나이의 어린 여자애들이 일하는 공간은 일어설 수도 없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창문은 당연히 없었고요
몇년을 내내 그러고만 사니 당연히 폐병이니 위장병이니 병이 듭니다. 5년 이상 일한 사람 중에 환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다고 산재? 휴가라도? 그냥 잘리는 겁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빠듯한 데 모아놓은 돈이 어디있으며, 병원에 가면 그대로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분노한 전태일은 구청에 찾아갑니다
무시당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전태일은 해고당합니다
시청엔 근로감독관이 있답니다
시청에 찾아가봤습니다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엔 노동청이란 게 있답니다
청원서를 써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보다시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였습니다
아니 사실 전태일은 무슨 엄청난 걸 바란 게 아닙니다, 그저 법을 지키라고, 당신들 일은 제대로 하라고 한 것 뿐이었습니다
돌아온 것은 비웃음 뿐이었습니다
언론도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딱 한 곳, 경향신문만이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기사 하나를 써줬습니다
그리고 더한 핍박이 돌아왔습니다
이제 법을 지키는 경찰들이 전태일을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에게 국부라며 자식들을 돌봐달라던 전태일은 순식간에 빨갱이가 됐습니다
한편 집요한 전태일의 항의에 노동청은 1970년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아무것도 없었죠
11월 13일
전태일은 제 구실도 하지 못하는 이름 뿐인 근로기준법에 대한 화형식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조차도 두고 보지 못했습니다
경찰들과 용역들에 의해 플래카드가 찢겨지고, 짓밟혔습니다
마침내 전태일은 결국
스스로를 불사릅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돈이 없어 그대로 죽게 됩니다
이 한 청년의 분신은, 한국 사회를 뒤바꿔놨습니다
이상찬, 김차호 등 다른 노동자들의 분신이 이어졌고, 노동자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권리를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그 해 일어난 노동투쟁은 165건, 이듬해 일어난 노동투쟁은 1600여건에 달합니다
그제서야 세상이 관심을 가져줍니다
저렇게 처참하게 먹고 살아본 적이 없어 몰랐던 지식인들이 서민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서울대 법대생 100여명이 학생장을 치르겠다 외쳤고, 상대생 400여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들이 전태일 추도식을 열고 노동자 처우 개선을 외치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휴교령이 떨어졌지만 대학생들은 농성을 계속했습니다
'노동'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했으나 수많은 노동자들로 이루어졌던 한국 사회는 이렇게 들끓기 시작했고
휴교령이 내린 다음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성명을 발표하고, 나중엔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노동자 처우 문제는 정치 이슈로까지 번져나갑니다
그동안 민주, 민족밖에 외치지 못했던 야당이, 재야가 노동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전쟁 이후 몰락한, 조봉암 사형 이후 거의 말살된 한국 진보가 꿈틀대기 시작한 겁니다
전태일 열사가 없었다면 한국 노동계는 얼마나 더 막장일지...
근데..
언제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됐냐고요?
그건
다음 이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