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역사는 곧 대중국 항쟁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베트남은 오랜 세월동안 중국의 침입과 지배에 항거하여 투쟁해왔습니다. 그중 민족의 지도자로서 추대받아 중국을 물리치고 두들겨 팬 베트남의 명장들 및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는 베트남의 이순신이라고도 하며 몽골의 대군을 강에다 수장시켜버린 쩐흥다오나 청나라 수십만 대군을 박살낸 광중대제 등과 같이 굵직굵직한 인물들 외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지도자가 되어 항거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1. 쯩 자매
아무래도 베트남의 대중국 항쟁사에 있어서 봉기를 이끈 지도자가 다름아닌 자매라는 점에서 독특한 경우라 할 수있겠네요.
베트남과 중국의 오랜 악연은 베트남의 최초의 국가라 볼수 있는 남월(南越 : 남비엣) 왕조가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의 정벌로 멸망당하여 그곳에 한나라의 행정구역이 새로이 설치되고 본격적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던 때부터 시작된다 볼수있습니다.
그렇게 오랜기간 동안 지배를 받다가 후한(後漢)의 광무제의 대인 서기 40년 무렵에 이르러 당시 베트남을 통치하던 '소정(蘇定)' 이란 작자가 과도한 세금징수 및 베트남인들에 대한 탄압이라는 삽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인들의 반중국 감정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결정적으로 베트남인들이 폭발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키게 된 사건이 있었으니 이 소정이 '티 사익' 이라 하는 베트남의 유력가문 인사를 죽인 일이었습니다. 이는 베트남의 토착 지배세력이 점점 수탈화되어가는 중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태였는데, 문제는 이 티 사익이 당시 베트남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던 인물이었는지, 이 사건은 베트남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곧 불만은 폭발하여 대중국 항쟁운동의 기폭점이 되어 대규모 민중봉기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티 사익의 아내였던 쯩짝(徵側)과 그 동생인 쯩니(徵貳)라 하는 여인들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봉기의 선두에 섰더라는 겁니다.
쯩짝(徵側)과 쯩니(徵貳) 자매.
분명 시대는 한나라 때인데 작살나는 한나라 군이 변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함정..
이 쯩 자매가 반란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은 단순 언니인 쯩짝이 티 사익의 아내라서 남편의 복수를 갚겠다는 생각에 나선 것이 아니라 이들 쯩 자매 또한 베트남의 토착 지배층 가문출신의 인물들이었기에 점점 자신들의 베트남에서의 입지와 이익을 앗아가는 중국의 수탈과 횡포에 반발하여 나섰던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당시 기준으로는 여성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었다라는게 꽤나 쇼킹했을것 같지만 당시 베트남군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고 개중에는 여자 장수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먼 훗날 현대의 베트남전에서도 여자 베트콩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게 아닌듯 하네요.
한나라군을 박살내는 쯩 자매
한나라군은 이를 진압하고자 쯩 자매가 이끄는 봉기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입니다만, 세를 업고 달겨드는 봉기군이었던지라 한나라군은 족족 격파당하고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게다가 머지않아 쯩 자매의 베트남군은 당시 베트남에 설치된 한나라의 군(郡)인 교지(交趾)를 점령하고 한나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해버리는데에 성공하고요.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언니 쯩짝은 왕위에 올라 한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된 왕국을 선포함으로서 봉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합니다.
한편 한나라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쯩 자매의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인근의 수많은 성들 및 고을들이 모두 쯩 자매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그 영역이 오늘날 광동성 남부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건대, 결국 이는 제국의 변방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제국의 영토요, 남방영토가 뚝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좌시할리 없던 한나라는 이를 진압하고자 토벌군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토벌군의 장으로 임명된 이가 <삼국지>에서 나오는 마등, 마초의 선조이자 남만정벌 중이던 제갈량을 도와줬다는 마원(馬援)입니다.
이 마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에 서북방의 흉노나 강(姜)족 과 같은 이민족 오랑캐들을 때려잡던 경력의 소유자로서 그야말로 '대 이민족전 전용 결전병기' 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만큼 주로 변방에서의 이민족 토벌에서 공을 세워오던 명장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원에게 광무제가 남방에서의 소란을 진압케 할 토벌군의 지휘봉을 넘겨준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서기 40년, 쯩 자매가 베트남에서 한나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 근 3년 동안 한나라는 그동안 수차례 토벌군을 보내 진압하고자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이제 3년여만인 서기 43년 무렵, 이민족 킬러 마원을 보내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달리보면 후한은 물론 전한-후한 통틀어 한 왕조 최고의 명군이라 불리우는 광무제 치세 하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대국 후한을 상대로 당시로는 소국이나 다름없는 베트남(사실 이것도 그때 베트남이 이렇다할 나라도 아니었고 단순 식민지에 불과했던 점까지도 감안한다면야..)이 3년씩이나 버티며 선전해왔다라고 볼 수도 있을겁니다.
아무튼, 마원은 그 명성에 걸맞게 베트남에 도착하는 즉시 쯩 자매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여 족족 쯩 자매군을 격퇴하고 연전연승을 거두게 됩니다. 결국엔 마원의 토벌군에 밀린 쯩 자매는 사로잡혀 치욕을 당할 바엔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 여겨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중국 측 기록에서는 쯩 자매를 잡아다가 처형했다고 합니다) 쯩 자매의 죽음으로 베트남인들의 봉기 또한 사그러들게 됩니다.
결국에는 봉기는 곧 반란으로 그치게 되었고 베트남은 다시 중국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물론 그 수준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어서 말이지요.
2. 찌에우 티 찡
앞서 본 쯩 자매의 반란은 우선 그 반란의 지도자가 여성이라는 독특한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그 규모나 의의 측면에서도 볼때 베트남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건입니다만, 역시 반란의 주체가 여자이며 똑같이 대중국 항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주목 못받는 마이너(?)틱한 반란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베트남은 위에서 말씀드린 쯩 자매의 반란 이후로도 쭉 중국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한편 중국은 한(漢)이 멸망하고 삼국시대로 돌입한 상태였는데요, 여기서 삼국 중 베트남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던 나라는 오(吳)나라였습니다.
물론 그때 베트남이라고 해봤자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북부의 일부분에 해당되는 지역이었습니다.
후한 말 무렵 베트남의 통치관리로 부임하여 중국인이라고는 하나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살갑게 지내며 비교적 선정을 베풀던 사섭(士燮)이란 인물이 오나라에 복속하면서 자연스럽게 베트남도 오나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인데, 선정으로 베트남을 다스리던 사섭과는 달리 이 오나라도 과거 후한의 전철을 밟기라도 하는 듯 과도한 세금징수와 탄압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과거처럼 반복되는 수탈과 횡포 속에서 조구(趙嫗 : 찌에우 티 찡)라 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근현대 시기에 쓰여진 베트남의 역사책인 <베트남 사략(史略)>에서는 조구의 생애를 다루면서 조구가 바람을 다루고 물위를 걷는데다(예수?) 바다의 고래를 때려잡을 힘을 가졌고 어쩌고 저쩌고 등등.. 그야말로 영웅성을 잔뜩 부각시키는데 이건 논외로 하고 다만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왜 저들(중국)의 노예로 살며 머리를 숙여야 하는가?" 라며 자발적으로 천여명의 반란군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카더라.. 그러나 이건 앞서 밝혔듯 20세기 초에 나온 책인지라 그닥 신빙성은 없고 다만 베트남의 유명 정통 역사서인 <대월사기>를 보면 앞뒤과정은 다 생략되어 있고 조구가 반란군을 이끌고 오나라의 여러 군(郡)들과 고을을 공략하는 데서부터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 보셨듯 족장의 딸들이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출신성분이 그래도 지배계급이던 쯩자매와는 달리 조구는 이렇다할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일반 평민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으니 단순 범인(凡人)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을듯 하네요.
아무튼, 서기 248년, 조구가 봉기한 그 해에 조구가 이끄는 반란군이 구진(九眞), 교지(交趾) 등의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하자 이에 오나라의 손권은 즉각 반격명령을 내립니다. 다들 아시는 오나라의 중신 육손의 일족인 육윤(陸胤)이란 인물을 토벌군의 장으로 임명하여 보냈던 것인데, 여기서 조구의 반란군은 오나라 군에 맞서 무려 6개월간 버티며 항전합니다.
여기서도 베트남측의 기록을 빌려 보자면 조구가 전략 및 전술에 능하여 오군(吳軍)을 족족 격파하니 이에 육윤이 한가지 꾀를 내었다라고 나옵니다. 무슨 꾀인가 하니, 조구가 불과 23세의 젊은 처녀라는 점을 이용해서 병사들 더러 조구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라 명령했던 것인데요. '처녀' 이던 조구가 이를 보고 수치스러워 하며 부끄러움을 타고 당황해 할때 일제히 공격 명령을 내려 조구의 반란군을 격파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려서 (...) 결국에는 조구의 반란군은 수세에 몰린 나머지 조구는 어느 성으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조구에 관한 기록의 마지막입니다. 쯩자매의 경우처럼 조구가 이끌던 반란군도 지도자의 죽음으로 와해되었고 베트남은 다시 오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오나라의 기록대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어 교주(交州 : 베트남 지역을 말합니다)는 다시 맑아지고 안정되었다.' 고 합니다.
하지만 조구는 이후로 대중국항쟁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후대 베트남 역대 왕조들의 추앙을 받아 신격화 됨으로서 사당에 모셔지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사당이 있다고 합니다.
조구의 사당 벽에 걸린 현판.
기록대로 '흰 코끼리를 타고 갑옷을 두른채 다녔다.' 라는 묘사가 반영된 듯한 장면입니다.
조구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
횡설수설 적어본 감이 없잖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