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삼국지12에서의 왕숙 짤
왕숙이란 인물은 삼국시대 위(魏)의 신하로서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에게도 연의에서의 활약은 그닥 눈에 띄지 않는 탓에 별로 인지도 없는 인물입니다. 우선 이 왕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의에서도 나오듯 제갈량과의 썰전에서 피꺼솟해서 죽은 위나라의 고위대신 왕랑의 아들이자 훗날 진(晉)을 세우는 사마염의 외조부가 됩니다. 한마디로 빵빵한 명문가의 자제라고 하겠는데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왕숙은 유교 쪽에서는 한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질 정도로 주로 학문 쪽으로 두각을 드러낸 학자 스타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국시대가 정립되기 전시대인 한(漢) 왕조는 국가 이념을 유교로 택했고 또한 관학화를 통하여 유교를 탐구하는 학문인 경학 역시 융성해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 왕조는 쇠퇴해갔고 후한 말에 이르러서는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하매, 이에 반발한 관료들과의 마찰로 빚어진 사태인 소위 '당고의 화(黨錮之禍)' 라 불리우는 사건으로 인하여 많은 유생들이 피해를 입고 변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때를 시작으로 유교는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후한의 몰락의 첫 신호탄이라 할 수있는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오랜 전란 속에서 많은 선비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전란과 기아 속에서 허덕이며 유교경전을 내팽개칠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이후 후한 말의 혼란을 틈타 집권한 조조가 탈유교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던 점 또한 한몫했습니다. 그래서 이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유교보다는 주로 불교나 도교가 도탄에 빠진 민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던 것이고요.
그러나 이러한 추세 속에서도 등한시 되는 유교를 붙들고 연구하는 학자들은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정현(鄭玄)이란 인물과 이 글의 주인공인 왕숙(王肅)입니다.
정현
정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뭐 연의에서는 유비가 노식과 정현에게 글을 배웠다카더라 식으로 무슨 동네 서당스승 이미지로 등장합니다만 실상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권위자로 일컬어지며 높은 식견으로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오랜세월 유교를 연구하며 많은제자들을 양성하여 정현학파라 불릴만큼 당시 유학의 주류학파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인데, 왕숙은 정현학파와는 비교적 다른 입장을 취하는 반대학파였습니다.
여기서 이 얘기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이해하기위해서는 정현과 왕숙이 학문의 연구를 두고 씨름을 벌인 원인인 유교경전의 해석방법들인 고문학/금문학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근데 이것까지 다 세세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머리 아프니 대강이나마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고문학이란 과거 진(秦)나라 이전의 유교문헌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고 금문학이란 한(漢)대의 유교문헌들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근데 여기서 문제는 두 학문이 내놓는 해석이 각기 다르다더라는 데에 있었던 것인데요, 이는 과거 진시황이 분서갱유로 유교경전들을 깡끄리 불태워 버린 이후, 한대에 유교가 국교로 택해짐에 따라 유교경전에 대한 연구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비교적 후대인 한대에 유학자들이 편찬하여 내놓은 유교경전과 분서갱유에서 살아남아 전해진 진나라 시대 이전의 유교경전 원본들과 비교해보니 내용도 다르고 해석도 다르더라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정현은 경학연구의 양대 학문인 고문학/금문학을 두고 고문학을 주로 하되 금문학을 가끔 채용하여 경학을 해석했던 것에 비해 이 왕숙은 정현처럼 고/금문학 중 어느 한 학문을 택해 주장하고 연구했다기 보단 굳이 어느 특정 학문을 정해서 경학을 연구할 필요없이 고/금문학이건 뭐건 둘다 이용해서 경학을 연구하자라는 식의 실용적 입장에서 바라본 학문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원체 정현의 학파가 유학의 주류학파로서 입지가 굳건했던지라 왕숙의 이러한 주장은 정현학파에 밀려 묻히고 맙니다. 자신의 학문연구 방식을 주장하자니 정현의 학파에 비해 자신을 따른 학파의 배경도 규모도 협소했던 왕숙에게 자신의 학문을 입증할 찬스가 도래합니다.
서기 249년, 당시 위나라의 실세가였던 황족 조상을 비롯한 그 일파가 정적 사마의의 쿠데타로 일거에 소탕되는 사건이 일어나니, 이를 일명 '고평릉 사변' 이라 부릅니다.
사마의.
조상.
당시 왕숙은 사마의 세력 쪽 인물이었는데요, 이 고평릉 사변을 계기로 왕숙은 사마의 정권 하에서 고위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의 딸은 사마의의 차남이자 사실상 위(魏)를 멸하고 진(晉)을 세웠다고 볼 수있는 사마소와 혼인시켜 명실명백한 권력의 최정점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위에서 밝혔듯 그 손자는 무제 사마염이고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숙 본인이 사마씨 정권 밑에서 종사하며 고위직에까지 올랐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불어 그의 학문사상도 사마씨들의 비호 하에 주목받기 시작했다라는 점입니다.
이전에 사마씨 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위나라에서 유행하던 학문사상은 권력자 조상을 위시한 휘하 추종세력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학문사상이자, 위진 남북조 시대의 주요 사상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른 바 '현학(玄學)' 이었는데요, 도교사상에 기초하여 기반을 두고 있다고는 하나 역시 경학의 한 부류이기도 했습니다.
즉, 현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조상세력을 축출한 사마씨 세력도 마침 자신들도 자세력을 하나로 묶어줄 사상을 필요로 했던지라 여기서 왕숙의 학문사상, 일명 왕학(王學)이라 불리우는 학문을 택하고 적극 후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숙 입장에서도 유학의 주류학파였던 정학(鄭學 : 정현학파)을 몰아내고 자신의 학문을 널리 퍼뜨릴 절호의 찬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고요.
사실 여기까지는 좋다 이건데, 다만 왕숙은 여기서 자신의 학자로서의 인생에 오명을 남길 짓을 저지르는데요, 바로 옛 유교경전들을 자신의 학문을 입증하기에 유리하게끔 일명 '주작' 질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정현의 학문이 유학의 주류로서 자리잡아 온데에는 그만큼 정현의 학문이 무결점 완벽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 확연하고 잘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괜히 주류학파로서 군림해온게 아니라는거죠. 이건 정현처럼 고/금문학에 정통했던 왕숙 본인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겁니다. 자신의 학문을 설파하자니 그동안 정학의 뿌리가 깊다는 걸 깨달은 왕숙은 차마 정현의 학문에 손대지는 못하겠고 아예 옛 유교경전들을 자신의 학문이 옳다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도록 경전을 조작하고 주를 달기로 했던 겁니다.
뭐 결국에는 왕숙이 바라던 대로 '주작' 의 효과는 톡톡히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마씨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이 큰 몫을 해냈고 더불어 자신의 주작질로 왕숙의 학문, 즉 왕학은 이 당시 위나라의 최고위 학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왕학 vs 정학의 구도는 훗날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됩니다. 북방의 북조(北朝)가 주로 정학을 유학의 주류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에 비해 남방의 남조(南朝)는 왕숙의 학문을 택합니다. 하지만 주작질로 뜬 학문이 아무래도 오래갈 수는 없는 법이겠죠. 왕숙의 사상은 이렇다할 후계자도 없이 사실상 남조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됩니다.
두서없이 횡설수설 적은지라 앞뒤문맥이 어색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