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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송양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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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Orca
추천 : 10
조회수 : 1970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3/31 23:07:53

양지인의 배경이 된 송과 초나라의 전투인 홍수전투의 배경은 송양공 30년 여름에 송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면서부터 였습니다. 이 때 자어는 「그 화가 바로 여기에 있도다.」라고 경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나라의 요청에 초나라는 같은 해 가을 군대를 동원하고 그 밖에 위*허*등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송나라를 공격합니다. 이에 송양공도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결전을 벌이기로 합니다. 송양공은 스스로 중군이 되어 군을 지휘했고 대부 약복이와 화수로 그리고 공자 탕도 장수로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상경 목이도 보좌관으로 함께 출전했습니다.

 

송양공 30년 11월 겨울, 송나라는 초성왕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와 홍수(泓水)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때 송나라는 초나라보다 전략적으로 우위에 있는 지점에 있었고 초나라 군사들은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송양공의 이복형인 목이가 송양공에게 말했습니다.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들은 병사가 적으니 그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하여,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양공은 목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송나라군이 화살 한 번 쏘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초나라군이 강을 건너는 매우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이윽고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고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을 때 목이가 송양공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 공격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양공은 또 한번 목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리세.」

 

이렇게 초나라 군대는 송양공 덕분에 대열까지 갖추고, 송나라 군대와 격돌했습니다. 하지만 병력이나 전투 경험면에서도 송나라 군을 훨씬 앞서는 초나라 군은 가볍게 송나라 군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에서 송양공은 화살로 인해 다리에 상처까지 입었습니다. 이 전투의 소식을 들은 송나라 사람들은 양공을 크게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송양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1].」


송양공의 말에 자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은 공적인데,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공담만을 늘어놓으십니까? 주군의 말씀대로라면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홍수 전투에서 승리한 초성왕은 송나라에서 위협당하던 정나라를 구해주었고, 정나라는 초성왕에게 술과 음식으로 그를 대접하고 당시 정나라 군주였던 정문공은 자신의 두 딸을 초성왕에게 아내로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송양공은 이 홍수 전투에서 당한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안 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pilogue 1

 

이 홍수 전투로 인해 초나라는 사실상 패권 다툼에서 선두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나라는 위대한 군주인 제환공 사후 후계 다툼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서방과 북방의 진(秦)과 진(晉)은 서서히 강국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지만, 아직 중원의 일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에는 그 힘이 모자랐습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초와 패권 다툼을 벌인 송나라는 본문 내용처럼 홍수 전투 이후 완전히 패권 다툼에서 탈락했습니다.


 

Epilogue 2

 

성득신은 이 전투에서 큰 공적을 세웠는데, 이 전투 이후 성득신은 초나라의 재상인 투곡어토를 뛰어넘는 인망과 지지를 얻게 됩니다.


 

Epilogue 3

 

초성왕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문공에게 두 딸인 백미와 숙미를 아내로 얻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정나라 대부 숙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왕은 예를 알지 못해서 일생을 곱게 마칠 수는 없을 거야, 향연의 예를 받고 마지막에는 남녀를 분별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가 패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초성왕은 재위 기간 동안 패자(覇子)가 될 수 없었고, 말년에는 아들인 태자(太子) 상신에게 살해당합니다.  

 

[1] 춘추좌씨전에는 송양공의 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자는 두 번 다치지 않게 하고, 이모를 포로로 하지 않는 법이다. 옛 성인들의 싸움 방식을 보면, 적이 험지에 들었을 때 괴롭히지 않았다. 비록 내가 망국의 후손이라고는 하나, 어찌 대열을 갖추지 않은 적에 대해 진격의 북을 울릴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에 대한 목이의 발언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군대가 싸우는 목적은 이기기 위해서이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어차피 나라를 위해 군사를 쓸 바에는 적이 좋지 못할 때에 치는 것이 좋다.」

 

「춘추좌씨전」저자인 좌구명은 이러한 목이의 발언을 통해 송양공의 이상한 인의론을 비판했습니다. 

 

 

※ 상당수의 사가들이 송양공의 홍수전투에서 보여준 이상한 인의에 대해 비판을 했지만 사마천은 송양공의 행동을 어느정도 높게 평가했습니다.

 

「송양공이 홍수에서 비록 패하기는 하였으나, 어떤 군자는 대단히 칭찬할 만하다고 여겼다. 당시 중원 지방의 국가들이 예의가 없는 것을 비탄하면서, 그를 포상한 것은 송양공이 예의와 겸양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송양공은 대인배입니다. 송양공 12년(초성왕 34년)에 송양공은 녹상이라는 곳에서 회맹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송양공은 초나라를 회맹에 불러들였습니다. 목이는 반대를 했지만 송양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녹상에서 개최된 회맹에는 초성왕과 제효공, 송양공이 참석했습니다. 이 때 송양공은 다음 회맹 때, 제후들을 불러줄 것을 초나라와 제나라에 요청했습니다. 초나라와 제나라는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 우라는 곳에서 회맹이 열렸습니다. 이 회맹에 참석한 나라는 송을 비로하여 초*진(陳)*채*허*조*정나라까지 일곱 나라였습니다. 녹상 회맹에서 참석하겠다던 제나라는 참석하지 않았고, 노나라(당시 군주 노희공)도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맹주의 자리를 두고 송양공과 초성왕이 갈등을 벌였고, 초성왕은 비밀리에 데리고 온 군대로 송양공을 붙잡았습니다. 결국 송양공은 같은 해 겨울에 제후들(참가한 나라는 초*노*진(陳)*채*허*정나라까지 일곱 나라)이 박이라는 곳에서 집회를 가질 떄 초나라에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나라에게 붙잡혀서 포로 생활까지 했다면 초나라에 대한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테고 그런 와중에 초나라의 힘도 잘 알았을텐데, 이렇게 초나라에게 인의를 베푼 것을 보면 대인배는 대인배인 것 같습니다.

 

 

※ 출처 : 사기 송미자세가*초세가, 춘추좌씨전, 위키백과, 네이버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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