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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세중립국 선포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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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다윗김
추천 : 2/5
조회수 : 1698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21/05/17 11: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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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세중립국 선포를 기대하면서.

慶州金氏백촌공파 宗報.

2021. 5.17

들어가면서

한국의역사는 반도 국가답게 전쟁과 분단 .통일의 반복된 역사를 답습해왔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은 서양제국의 세계강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본과 미국의 센프란시스코 조약으로 한국을 합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역시 2차대전 종식을 위한 회담인 승전국 회담에서 38선이 그어졌으며 ,냉전이후 세계 강대국간의 힘의 역학관계로 6.25가 터졌고 , 하물며 몇주전에는 한국의 북한삐라 살포 금지법 문제로 미국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려 큰소란이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중국의 인테넷 부대가 참여하여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물러가게 만들었다는 여러 정황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는 좀 평안하다고 하나 언제 어느때 실제적 전쟁 상태로 빠져들지는 그 누구도 알수 없는 상황(지정학적)이다.

본론

스위스 영세중립

대표적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오늘날 영세중립의 국제적 모델이다.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주변 강대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지정학적 관점에서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스위스가 영세중립 정책을 추구하게 된 동기는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이 있다.

 

국내적 요인은 스위스가 15세기 중엽부터 자치권을 가진 각 주(: Canton)간에 영토획득을 위한 전쟁으로 치열한 내전이 계속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대내적 중립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국제적 요인으로서는 스위스가 주변국가의 침략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이중적 목적에서 영세중립 정책이 출발한 것이다.

 

그로 인해 스위스 국민들은 어떻게 하면 격화되고 있는 주들 간의 전쟁을 종식할 것인가에 대한 대응책을 고심하게 되었다. 각 주간의 갈등과 대립을 종식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고안된 것이 각주가 다른 주들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스위스가 결정적으로 중립정책을 구상한 것은 1515년 프랑스와의 마리그나노(Marignano) 전투에서 대패한 후 스위스 의회는 영세중립 정책을 제안했다.

 

스위스는 유럽의 헤게모니 경쟁에 더 이상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1546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세날칼디언(Senalcaldian) 전쟁 중 영세중립 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프랑스가 1647년 베른(Berne) 지방의 서쪽 스페인 영토인 프랑쉐 콩테(Franche Comt) 지방을 병합함으로써 스위스는 프랑스의 위협을 직접 받게 되었다. 스위스의 주변 국가들은 스위스의 영세중립 선언으로 18세기 초부터 스위스를 유럽의 평화협정에 참여시키지 않으면서 사실상(de facto) 중립국가로 활동하였다[1].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연합군대는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한 후 나폴레옹 군에 참가한 스위스를 위협하자 스위스는 모든 교전강대국들에 대해 영세중립을 선언했다[2]. 4개 동맹국들은 18143월 체결된 쇼몽 조약(Chaumont Treaty)에서, “스위스 연방은 구 경계선을 중심으로 국경을 재설정하고, 그 독립을 강대국들의 보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스위스는 1815320일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하는 비엔나 회의에서 스위스의 영세중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스위스는 같은 해 파리 조약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포르투갈, 스페인, 스웨덴 등 8개국이 스위스의 영세중립을 정식으로 승인했다[3]. 스위스의 영세중립과 관련된 모든 선언들은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한 후인 18151120일 채택된 파리선언에서 연합국에 의해 다시 확인되고 보장됨으로써 스위스는 주변국들로부터 국제적으로 승인된 세계 최초의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으로서 어떠한 동맹이나 경제협력에도 참가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경제동맹, 관세동맹, 심지어 국제적 안보연합에도 가입을 피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국제사회의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스위스는 국제적 일원으로서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따라서 스위스 국민들은 2001310일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국제평화 유지활동을 통한 국제사회에 이바지하고, 자국의 군대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군대와 합동으로 군사훈련에 참가하여 자국의 민방위군의 전력증강에 찬성하였다. 그 결과 스위스 국민은 200234일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국제연합 가입을 찬성함으로써 유엔에 가입한 후 세계 가난한 국가에 많은 경제지원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오스트리아는 1934년 히틀러(Adolf Hitler)가 요구하는 오스트리아와 독일나치당의 동맹조건을 무기력하게 수용함으로써 히틀러가 주장하는 제3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19455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었고, 74일 모스크바 선언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오스트리아를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으로서 4개 지역으로 분할됨에 따라 정치지도자와 국민들은 19456월부터 자주독립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4개 연합국 군대를 어떻게 하면 명예롭게 철수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영세중립 정책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정치지도자들은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선 소련이 임시 수상으로 추천한 인사는 당시 명망 있는 사회주의자 칼 레너(Karl Renner)였다. 그는 소련이 바라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잘 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강력한 독자노선을 견지하였다. 레너는 임시정부를 구성 할 때에도 사회당과 국민당, 및 공산당 등 좌우 세력을 고루 안배한 중도정부를 수립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에 대한 사례는 스위스의 경우와 상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과정은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1945부터 1953년까지 오스트리아 문제를 토의함에 있어 오스트리아 대표는 참석하지 못하고 연합국 대표들만이 독자적으로 오스트리아 문제를 결정하는 시기다. 2단계는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오스트리아 대표가 연합국 대표와 동등한 자격으로 오스트리아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외교적 권리를 획득한 단계이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실현과정에서 오스트리아 정부가 보여준 점령국에 대한 외교정책과 협상기술은 영세중립을 지향하는 국가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다. 첫째, 영세중립의 주관적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정부는 주변 점령국에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 정책을 지향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천명하였고 국민들의 의사를 영세중립 정책으로 결집하는데 주력하였다. 다시 말해 4개국 점령국가 들이 오스트리아의 전후처리 문제에 견해차이로 교착상태에 직면할 때 오스트리아 정부는 통일과 독립을 위해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 정책이 바람직하다는 대내적 의사를 통합하는데 주력하였다.

 

둘째, 오스트리아 정부가 탈이념 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동구권과 같은 공산화 국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방국가가 주도하는 국제협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서방점령 국가들에게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노선을 지향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선전하였다. 예를 들면, 19482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되고, 베를린 봉쇄 등으로 국제정세가 어려울 때 오스트리아는 소련의 견제를 무릅쓰고 미국이 주도하는 마샬 플랜(Marshall Plan)에 가입했다.

 

셋째, 오스트리아 정부는 대외정책 노선으로 영세중립 정책을 공식 천명했다. 오스트리아는 195111월과 195222회에 걸쳐 오스트리아의 외교정책으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을 지향하여 세계 어느 국가에도 편향되지 않은 공평한 균형외교 정책을 유지할 것을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또한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국제문제가 있을 경우, 의도적으로 국제사회에 제기하여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때로는 주변국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아 처리했다[4] .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실현 후기 단계는 연합국 외상회의가 1954125일 베를린에서 개최되었을 때, 오스트리아 대표가 정식으로 회의에 참가한 시기부터 시작된다. 종전까지 연합국들은 오스트리아 문제를 일방적으로 협의하고 결정했으나,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대표가 연합국 회의에 참여함으로써 자국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연합국가의 외상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문제를 최초로 언급한 대표는 소련외상이었다. 몰로토프 (Vyacheslav M. Molotov) 외상은 조약을 통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소련과 오스트리아는 1955415일 모스크바에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영세중립 정책을 지향한다는 전제를 포함한 모스크바 각서(Moscow Memorandum)를 체결했다. 모스크바 각서는 오스트리아의 국가조약(Austria State Treaty)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고, 19555154개 점령국 외상들이 모스크바 각서를 승인하고 1955727일까지 비준서를 모스크바에 발송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 정책이 효력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소련의 지원으로 10년 만에 영세중립의 국가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코스타리카의 영세중립

중남미 남부에 위치한 코스타리카는 150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1821년 독립된 후, 다시 멕시코에 병합되어 중남미 연방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코스타리카는 1890년 중남미에서는 최초로 자유선거를 실시한 후 1948년 독립국이 되었다. 헌법상 국가의 명칭은 코스타리카 공화국(Republic of Costa Rica)이다.

 

코스타리카는 1948년 대통령 선거 결과로 정부와 군부가 대립하던 중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6주간의 내전으로 국민 2000여 명이 사망함으로써 의회는 194911월 평화헌법을 채택하고, 군대를 해산한 후 오늘날까지 군대가 없는 국가로 중남미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된 국가가 되었다.

 

코스타리카의 평화헌법 제12조 제1항은 항구적 제도로서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2항은 군대를 대신하는 조직으로 치안과 국경경비를 위해 시민경비대(Civil Guard)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평화헌법 제정 후, 병사의 수만큼 교사를 둔다는 국민적 합의로 군사비를 교육예산으로 전용함으로써 국가예산의 0퍼센트가 교육비로 사용하고 있다[7] 코스타리카는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 1980년 유엔평화대학을 설립하였으며, 국내·외 국가들과 갈등이나 무력대립을 피하기 위해 19831117일 비무장 영세중립 정책을 선언함으로써 주변국가로부터 묵시적 승인을 받아 영세중립국의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코스타리카는 스스로 선포한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바티칸의 영세중립

바티칸 시는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영세중립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실상(de facto)의 영세중립국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바티칸은 이탈리아의 영토 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배타적 영토권에 속하며, 이탈리아에게만 조약에 따른 영세중립의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바티칸은 로마 교황청으로 문화재 보호와 정치적 독립이라는 특수한 목적에 따라 이탈리아와 중립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바티칸 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중립을 추진하였다.

 

첫째, 교황청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보호다. 바티칸은 서양의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기초로 한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로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찬란한 기독교 정신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보호와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바티칸의 정치적 독립이다. 과거와 같이 로마 교황청이 이탈리아의 모든 문화를 통솔, 지배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제는 이탈리아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외교권과 이탈리아에 대한 치외법권의 법적 지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독자적 통치기구로서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끝으로, 바티칸의 재산에 대한 보호이다. 전 세계 신도들로부터 모금된 종교자금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제활동을 해야 하며, 이에 대한 이탈리아의 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바티칸은 이탈리아 내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은행, 선박, 보험, 광산, 항공, 전자 등 전 분야의 투자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보장을 받는 것이다. 바티칸은 전 세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체로서 그 정책은 가톨릭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다. 바티칸의 중립화 협정은 계속적이고 배타적이며 이탈리아에 대해서만 그 효력이 지속된다. 하지만 세계 대다수 국가는 바티칸과 이탈리아간의 중립화 협정을 사실상으로 인정하면서 바티칸의 중립화와 관련된 제반 권리를 묵시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 영세중립

투루크메니스탄은 1991년 구소련의 붕괴로 독립국이 되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농업국가로 19959월 유엔총회가 투르크메니스탄이 신청한 영세중립 방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함으로써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투루크메니스탄은 유엔이 승인한 유일한 영세중립국이다.

결론

표에 나온데로 동북아시아는 인구에 비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자고로 돈이 있는것에 사람들이 몰린다. 또한 사건 ,사고도 역시 몰린다. 이를위한 한국의 보험은 국내적으로 또한 국제적으로 영세중립국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의 평화를 담보한다고 생각한다. 물런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고종황제가 실패한 기록이 있다.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재수,삼수가 무슨문제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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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적)

1) Dieter, Fahrni, (1994). An Outline History of Switzerland From the Origins to the Present Day. Pro Helvetia.

2) Hwang, In K, (1980). The Neutralized Unification of Korea in Perspective. Schenk man Book.

3)Edgar., Bonjour, (1952). Swiss Neutrality : its history and meaning. Allen & Unwin.

4)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 인간사랑. 1989.

(이미지) 구글

*본 내용은 위키백과에 많은 참조를 하였음을 알립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C%84%B8%EC%A4%91%EB%A6%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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