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취법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 꼭 스파이라고만 할 것은 아닌게,
일본에서 조선으로 은광을 들여오고, 조선에서 은을 제련해 다시 일본으로 보냅니다.
여기에는 일본 상인, 조선 상인, 조선 제련업자는 물론 조선 지방관리들까지 다수 참여했었습니다.
이 밀거래 과정에서 조선은 아마 상당한 로열티와 정련료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얼마나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회취법의 개발 이전에도, 회취법이 일본에 들어가 일본 은이 폭발한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일본 은은 조선으로 꽤나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금은이 없는 나라이다보니 .. 제대로 된 통계가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왜은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천하게 되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은이 폭발적으로 생산된다 해도 결국 이 은을 유통시켜서 이익을 취해야 할 것인데,
은을 싸지고 중국으로 몰려가던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상인에게 팔아서는 남는 게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국가대 국가로서의 교역량이 제한(감합)되어 있었던 만큼 일본 은의 남는 물량은 조선이나 류큐를 경유한 중국과의 교역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이때 조선의 상품으로 은보다 고가에 거래되었던 것이 인삼이고, 인삼 거래를 위한 왜은을 주조할 정도였지요.
이 시기 세계적으로 교역되었던 상품은 아프리카의 금과 노예, 아메리카의 은, 일본 은,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였죠.
아프리카 노예의 목숨은 결국 아메리카에서 은과 교환될 처지였으므로 중국을 제외한 모든 교역국의 교역품은 금과 은입니다.
뭐.. 당시 중국의 위상은 경제적 측면에서 지금의 미국을 한 다섯배 이상 뻥튀기해놓은 정도라고 하면 될까요.
특히 중국이 일조편법과 지정은제를 실시하면서 중국 내 은의 수요가 높아지고 (= 은 가치 상승)
마침 아메리카와 일본에서 값싸게 은을 채취할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교역을 위한 수단으로서뿐 아니라 값싸게 채취한 은을 중국에가서 고가로 팔려는 상품으로서의 역할까지 하게됩니다.
이에 따라 아시다시피 막대한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중국이 아무리 경제 규모가 크다 해도 이런 일방적인 무역이 계속 지탱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16세기 말이 되면 포화상태가 된 중국 내 은의 가치가 떨어지고, 은 교역이 중단됩니다. (중국에 가져가 봐야 이득이 없으니)
한편 아메리카에서 캔 은의 상당량이 중국으로 갔습니다만, 유럽의 본국으로도 상당히 들어갑니다.
또 중국 장사가 점점 시들어가면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은의 양이 폭증합니다.
은 유입의 증가는 당연히 은 가치를 하락시키고, 물가가 폭등하는 가격 혁명이 일어납니다.
지금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이 쌍끌이 적자로 찍어대는 달러 때문에 세계가 번갈아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사정이 달라지자 당시 세계 전체가 인플레이션에 허덕이게 된 것이지요.
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건을 사야하는 봉건제후와 농민의 구매력은 약화되고, 상품의 유통생산을 담당하던 상인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산업 혁명의 전주곡이 되는 상업 자본이 대량으로 축적됩니다. 정확한 양상은 다르겠지만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촉진한 '역사적' 인플레이션일 것 같지만, 그리고 상업자본가들에게는 호시절이었던 것도 맞지만, 안그래도 못살았는데 물가 상승으로 인해 실질 임금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농민들에게는 지옥이었을 겁니다.
조선은 이 흐름에서 한발 비켜서 있습니다.
잠깐 언급했듯이 조선은 '공식적으로' 금은을 사용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은 교역망에 상당히 깊게 참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비유하자면 날려도 되는 여윳돈을 가지고 뛰어들었다는 정도의 느낌입니다. 어느 자료에 보니 당시 조선의 쌀 생산량이 대략 일본의 두 배가 되었다고 하던데 즉, 조선은 그때까지 경자유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기울였고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뭐 남들은 다 장사하는데 혼자 퇴행적으로 농사짓고 있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는 일입니다만 ... 어쨋거나 조선은 세계적인 은 과잉공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상대적으로 적은 타격을 입습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15~17세기까지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은 물론 대국 명나라 사람들보다도 훨씬 잘먹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조선 사신들이 일본에 갔을 때 밥먹는 양이 너무 적어서 놀랐다는 얘기도 있지요. 결국 당시 조선은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은 장사가 폭삭 망해도 (타격이야 입겠지만) 백성들이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것은, '역사적 발전' 혹은 '경제적 발전'은 꼭 좋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15-16세기의 조선 사대부들이 국가 정책을 중농주의로 끌고가는 바람에 200년 뒤 후손들이 곤욕을 치른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200년 동안 옆나라 백성들이 굶을 때 조선 백성들은 밥을 대접째로 퍼먹고 산 것도 -_-; 사실입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상업에 빨리 눈뜨고 근대화에 빨리 착수한다는 의미는, 제가 생각할 때 조선 사대부들이 농민들을 쥐어짜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광산에서 일을 시키고, 인신매매를 통해 대량의 노잡이나 짐꾼 노예를 부리면서 자본을 축적해간다는 의미라는 것이죠. (아마 저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의 조상님들은 어느 논두렁이나 산자락에서 채찍을 맞고 죽었을 겁니다.)
아마추어적인 생각이겠지만 어느 나라고 간에 사람이라는 족속은 바닥을 한번 찍고 똥인지 된장인지 맛본 후에야 비로소 그걸 해결해나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한정해 볼 때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며 유럽과 일본은 바닥을 찍었고, 조선은 바닥을 찍지 않았습니다. 이후의 발전 속도는 바닥을 경험해 본 사회가 더 빨랐지만, 과연 그 결과를 가지고 바닥을 찍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