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달려 우리는 한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아파트로 올라갔고,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나를 보고 말했다.
“잘 보세요.”
19750426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다름 아닌 여덟자리 나의 생년월일이었다.
이 사람들 도대체 누구일까?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머! 생각보다 괜찮네.”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회장님, 벌써 화가 많이 풀리신 것 같은데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그녀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 놓여있는 자동차 스마트키와 명함을 집어 나에게 건넸다.
“이곳에 지내시면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여기 박 실장님에게 연락하시면 돼요. 그리고 차는.. 아마 지하 주차장에 있을 거 같은데.. 직접 찾아보세요.”
그녀는 자신의 지갑을 열어 카드를 하나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 카드인데, 편하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대체.. 이게.. 왜.. 나에게 왜.. 이런 걸….”
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건 나중에 차차 알려드릴게요. 그동안 어떤 분일지 정말 많이 궁금했는데.. 오늘 이렇게 식사도 같이 하고.. 진짜 반가웠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그녀가 나가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지금 내가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짜 나는 한강물에 빠져 죽은 상태이고,
여기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환각이 아닐까?
양쪽 손 아래 느껴지는 소파의 스웨이드 가죽.
부드럽다.
나는 손을 올려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환각은 아니다.
이 사람들 도대체 누굴까?
그녀가 준 신용카드를 집어 이름을 확인했다.
LEE WOO JUNG
이우정.. 이우정.. 이우정….
이름을 되뇌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 아니다.
아파트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은 물론이고,
밥솥을 비롯한 간단한 취사도구,
그리고 쌀과 밑반찬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단 한가지 준비되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샤워를 하고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스마트키를 누르자,
주차장 입구 바로 앞에 세워진 검정색 중형차의 라이트가 반짝였다.
간단한 옷가지를 사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다.
가장 먼저 남성 속옷을 파는 매장에 들어갔고,
물건을 골라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었다.
영수증과 함께 카드를 돌려준 직원이 말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무슨.. 일이죠?”
“딱 1분이면 됩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백화점 직원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중 정장을 입고 있는 남성이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차장에서 차량 번호를 인식하는 기계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백화점 안쪽, 조금은 비밀스러운 장소로 안내했는데,
그곳에는 고급스러운 휴식 공간에 개인용 피팅룸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마.. 말로만 듣던 VVIP 전용 쇼핑 공간인 듯 했다.
쇼핑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고,
이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받은 서비스로 미루어..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검색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증권가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그녀는,
고졸의 학력으로 4대 증권사 중 하나인 이수투자금융에 입사했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단 3년만에 임원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가상화폐에도 손을 대고 있으며,
가상화폐를 통한 수익만 수백억 규모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증권가에서 ‘미여사',
정확히는 ‘미엿사' 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미래를 엿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전공을 살린 소소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는데 박 실장의 도움이 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우정 상무의 도움일 것이다.
이우정 상무는 종종 나를 찾았다.
회사일로 많이 바쁜 듯 했지만,
그녀는 늘 일주일에 한번 나와 함께 식사를 했다.
하루는 식사를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앗! 그래 보여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보던데.. 하하!”
요즘 나는 경제면 뉴스 기사를 꼬박꼬박 챙겨보고 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주식 투자를 하는 것도,
경제 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자꾸 눈이 간다.
“인터넷 기사에서 봤어요. 이수투자금융의 3/4분기 실적이 많이 줄었다고 하던데.. 그거 때문이죠?”
나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다음주에 주주총회가 있는데, 경영권 관련해서 준비할 일이 조금 있거든요.”
“일도 좋은데.. 건강은 꼭 챙기면서 일하세요. 내가 나이를 많이 먹은 건 아니지만.. 건강은 젊을 때부터 잘 관리해야 해요.”
나의 잔소리에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네, 꼭 그럴게요.”
그날 식사를 마치고,
나는 그녀에게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이제는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동안 잘 썼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 아파트에서도 나와 독립할 생각이에요.”
“아파트는 회장님이 준비해주신 거라, 제가 뭐라 할 말은 없는데.. 이 카드는 제가 드리는 거에요. 선물이라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쓰시면, 제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아이같은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진심이에요.”
“...”
“그리고 신용카드가 하나는 필요하실 거에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은우에게 사기를 당했을 때,
제3금융권까지 대출을 받은 것이 그 이유였다.
대출 만기일이 지나자마자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모든 신용거래가 중지되고 말았다.
나의 표정을 눈치 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3금융권 대출을 받으신 건, 회장님이 10원도 도와주지 말라고 못을 박으신 터라.. 그건 이해해주세요.”
“내가 이해를 하고 말고가 있나요. 지금 이렇게 도움 받고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그녀는 방긋 웃으며 카드를 나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고마우시면, 이 카드 다시 받아주세요. 음.. 그냥.. 이건.. 그냥.. 뭐랄까? 딸 같은 사람이 주는 선물?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될까요? 네?”
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오래전 현정이 떠오르는 건 사실이지만,
성적인 대상으로 이우정 상무에게 끌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대로..
딸을 향한 부모의 마음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결혼을 한 경험도,
자녀를 가져본 경험도 없기 때문에,
그냥 추측일 뿐이다.
시간은 흘렀다.
대출금을 거의 갚아갈 무렵이었다.
이우정 상무와 한 달 동안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전무로 진급을 한 직후였기 때문에,
회사일로 바쁜 줄로만 알았다.
한 달만에 나타난 그녀의 머리에는 하얀색 리본이 달린 핀이 꼽혀 있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 비운 후에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지난 주에 회장님이, 아니..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미안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제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고 계실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몇가지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쳐지났다.
“엄마가 죽기 전에 아저씨에게 남긴 말이 있어요.”
“혹시.. 어머니 성함이….”
그녀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맞아요, 이현정. 아저씨 처음 만난 날, 엄마 이름을 들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럼.. 혹시….”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말이 맞다면, 내가 아저씨 딸이 맞을 거에요.”
“...”
“그동안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그리고 그녀는 현정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현정은 전생에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아주 많이 반복해서 살았다고 한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현정은 나와 결혼을 하고,
우정을 낳아 우리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만..
우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나는 은우라는 젊은 여자에 빠져 현정과 이혼을 요구하고,
결국 사기로 전재산을 날린다고 한다.
반복되는 삶에서 현정은 나의 외도를 막으려 백방으로 애를 쓰지만,
늘 같은 결과였다고..
우정은 빈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1999년 10월 17일, 종로3가 파고다 빌딩 앞을 기억하시나요?”
1999년 10월이면 코스모스 졸업 후 작은 출판사에 취업을 했을 무렵이고,
출판사 사무실은 파고다 빌딩 4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혹시.. 그곳에서 내가 현정을 처음 만나는 건가요?”
우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이전 삶이었대요. 엄마는 그곳에서 아저씨에게 길을 묻지 않았어요. 엄마는 자신의 삶을 직접 바꿔보자는 결정을 내린 거죠. 더이상 비참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대요.”
“...”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엄마가 지금까지 살았던 삶 중에 가장 힘들었던 삶이었대요. 그날 아저씨에게 길을 묻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그랬어요.”
“왜.. 그렇게 후회를 한 건가요?”
나의 물음에 우정은 말없이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제스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내가 엄마에게 이번 삶은 괜찮았는지 물어봤어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참 좋았대요. 너무 좋았고, 더없이 좋았대요. 그래도 마음 속 깊이 꾸욱 걸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아빠 없이 나를 키운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우정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말했어요. 아빠 없어도 된다고.. 어릴 때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부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