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은 시장을 가기 위해 서둘렀다.
후유증 때문인지 이상하게 몸이 좀 무거워진 느낌이었지만
집에 식량이 하나도 없는 데다 이자도 꽤 밀린 상태여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부릉부릉"
오랜만에 주인을 반기듯 오토바이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그러나 숨겨져 있던 폭탄은 후안이 절반쯤 갔을 때 터저버렸다.
잘 나가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꺼져버린 것이다.
"이런 제길 뭐야"
뭐가 문제인지 이리저리 살피던 후안이 배기구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 순간을 오토바이가 갑자기 검은 연기를 미친 듯이 내뿜기 시작했다.
"콜록콜록"
후안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검은 얼룩이 덕지덕지 붙어 어느새 얼굴은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제기랄!"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후안은 오토바이를 걷어차버린 다음
길바닥에 주저앉아 성난 소처럼 씩씩거렸다.
화가 좀 누그러지자 다시 오토바이에 다가가 이리저리 살펴도 보고
시동도 걸려 시도해봤지만 전문가가 아닌 그가 무엇 때문에 고장이 났는지
알리가 만무했다.
결국 후안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오토바이를 질질 끌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몸을 일으키려던 후안은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몸에 아무런 힘도 남아있질 않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어제 무거운
오토바이까지 질질 끌고 왔더니 탈진한 모양이었다.
결국 후안은 이 날도 꼼짝도 못 한 채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냈다.
"쏴아아"
다음날 거세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 후안은 깜짝 놀라 창가의 커튼을 거뒀다.
밖에선 세찬 소나기가 떨어지고 있어 마치 빗금으로 도배된 세상 같았다.
그러다 몇몇의 빗금이 유리창에 부딪쳐 흐느적 물방울 되어 미끄러지며
후안에게 좌절을 선물했다.
이 비를 뚫고 도시를 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었다.
오토바이는 고장 난 상태였고
비 오는 날에 경운기를 모는 건 고장 내려고 작정한 짓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후안은 침대에 누워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며칠째 비어버린 속은 공허만이 들어차 무언가로 채우고 싶었다.
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빗소리에 묻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신가요?"
우울에 젖어있던 후안이 흐느끼듯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입고 있던 우비를 털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제서야 우비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누군지 파악한 후안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후안은 황급히 양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제니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저번에 왔을 때 보니 먹을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요"
침대에 앉아있던 후안은 벌떡 일어나 제니에게 다가가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보자기를 받았다.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마침 배가 너무 고프던 참이었거든요"
후안은 황급히 제니에게 받은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은 제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많이 온다니 큰일이네요
당분간 시장도 못 가시겠어요"
여전히 시선을 보따리에 유지한 채 후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때문에 큰일이에요 집에 먹을 게 없는데 시장도 못 가니..."
후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제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부족하시면 저희 집으로 찾아오세요
부족하긴 하지만 나눠 먹을 정도는 있답니다."
제니가 다시 우비를 둘러쓰며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아쉬운 마음이 든 후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시게요?"
"가야죠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입술을 몇 번 더듬거리던 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조심히 가세요"
후안은 빗속으로 걸어가는 제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안은 다시 적막한 공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후안은 오늘따라 유독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시 감성에 젖어있던 후안은 이내 허기짐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보자기를 풀고 허겁지겁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린 비는 그 기세를 그칠 줄 모르고 더해만 갔다.
다음날도 비가 그치지 않자 후안은 지겹도록 침대에 누워 우울의 바다를 헤엄쳤고
그 다음날도 그치지 않자 아예 우울의 심연까지 가라앉아 버렸다.
4일째가 되어 드디어 비가 그쳤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시장을 가야겠다 마음을 먹은 후안이 경운기를 꺼내왔다.
뒤에 고장 난 오토바이까지 싣고 경운기는 힘차게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절반쯤 갔을 때 일어났다.
"어이쿠"
갑자기 바퀴 한쪽이 밭 쪽으로 기울더니 경운기가 밭에 빠져버렸다.
3일 내내 내린 비로 인해 물을 잔뜩 머금은 흙길이 진흙길로 변하면서
경운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시동도 걸고 혼자 끙끙 거려도 봤지만
단단히 빠져버렸는지 경운기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던 후안은 짙은 욕설을 내뱉고는
가까운 농부가 살고 있는 제니네 집으로 찾아갔다.
"이게 누구야 후안 아닌가 그래 무슨 일인가?"
한참 점심 식사 중이었던 제니네 아버지가 후안을 반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후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제 경운기가 밭에 빠져서 그런데 경운기랑 밧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미안하네 오늘은 경운기로 할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오늘은 안되고 내일은 꼭 빌려주겠네"
후안은 몇 번이나 확답을 받은 뒤에야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밭에 내팽개쳐진 경운기는 불안의 씨앗이 되어 후안의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밤사이에 경운기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큰 경운기를 훔쳐 간다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겠지만
뒤에 실려있는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결국 후안은 경운기 주위에서 밤을 새우기로 마음을 먹고 텐트를 챙겨 갔다.
초여름의 별로 춥지 않은 밤은 후안에게 별 탈 없이 내일 아침까지 보낼 수 있겠구나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채 30분도 되지 않아 탐욕스러운 모기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후안에게 달려들었다.
그 작은 드라큘라는 후안의 전신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었고
귀에서는 윙윙대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팔 다리부터 온몸으로
번져가는 가려움에 후안은 허우적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이번엔 다른 문제가 후안을 괴롭혔다.
낮에 더웠던 부작용인지 새벽이 오자 여름에 어울리지 않은 추위가 후안을 엄습한 것이다.
특히 잠을 못 자 컨디션이 안 좋은 후안에게 그것은 체감상 늦가을에나 느낄법한 추위였다.
몇 번이나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 집으로 돌아가서 잠들면 내일까지 일어날 수 없을 거 같았다.
캐스터네츠라도 되는 것처럼 이를 딱딱 딱딱 부딪쳐대고 양팔을 비벼가며
아침까지 버틴 후안은 한참을 걸어 어제 약속한 제니네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