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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이 모여 하루가 된다는 걸 신기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그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된다는
이런 단순한 사실에 대해 신기해하는 사람 역시 별로 없다.
그러나 절실하게 시간이 필요할 때, 아니면 자신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이태까지 낭비했던 시간의 아까움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후안의 기록 중 발췌-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물건을 살려는 사람들과 팔려는 상인들
그리고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가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도시 외곽에 사는 농부 후안도 있었다.
그는 과일가게 앞에 서서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주황색에 동그란 모양을 가진 과일로 상큼한 향이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지만
가격이 부담될 정도로 비쌌다.
"후안 뭘 망설이나?
남부 지방의 특산품인 오렌지는 무척이나 귀하다구
지금도 풍년이기에 들어온 거지 아니면 평생 맛보기 힘들지도 모르네"
상인의 부추김에 후안의 결정이 점점 오렌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에 3실렌 이란 가격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엔 부담이 되었다.
"에이 그래도 3실렌은 너무 비싸요 조금만 깎아주게요"
"좋네 그럼 2.8실렌 어떤가?"
"에이 2.3실렌에 해주세요"
과일 상인이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럼 나는 뭐 먹고살라고 2.7실렌에 해주겠네"
후안과 상인이 흥정에 열을 올리는 사이
그것을 지켜보던 꾀죄죄한 꼬마 하나가 후안의 등 뒤로 다가와 바싹 붙었다.
눈치를 보던 꼬마는 상인이 한눈파는 사이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곤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저 저 저놈이!"
후안을 앞에 두고 차마 쫓아갈 수 없었던 상인은 애타는 손짓만 반복하다 한숨을 내쉬며 체념했다.
그리곤 이내 후안에게 오렌지를 팔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했다.
그 기색을 눈치챈 후안이 아쉬움을 담아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2.7실렌도 너무 비싸요
조금만 더 깎아주시면 제가 5개 전부다 사도록 하죠"
잠시 망설이던 상인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가 선심 쓰지 2.5실렌 그 이상은 나도 못 깎아주네"
"좋습니다. 구매하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후안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오렌지 값을 지불했다.
그 후에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상인은 후안에게 다른 과일을 추천했지만
딱히 관심이 가는 게 없었던 후안은 과일 상인의 배웅을 받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 후에도 시장 안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후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제 시장 구경이라면 질릴 정도로 했고 마땅히 사고 싶은 물건도 없었기에
슬슬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게시판에 붙은 전단지 하나가 후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간을 빌려 드립니다.]
라는 문구 밑에 간단히 약도만 그려진 전단지였는데
시간을 빌려준다는 문구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시간을 빌린다니 참으로 멋진 생각인걸'
왠지 마음이 들뜬 후안은 전단지에 그려져있는 약도대로 단숨에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유"
사무실로 들어온 남자는 투박한 손으로 빵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처음엔 악마인 줄 알았던 비서는 뒤늦게야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올 줄 알았다면 악마가 분명 자신에게 말해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사무실에라도 머물러 있었을 텐데
예정에도 없었던 손님이 찾아온 건 비서로서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악마가 말한 적이 있나 떠올리던 비서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어쨌거나 찾아온 손님을 오랫동안 세워두는 건 무례한 짓이었고
소파로 안내하며 비서는 상투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간을 빌리러 오셨나요?"
"아 네 전단지를 보고 찾아왔는데요"
"지금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손님이 소파에 앉자 비서는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오랜 기간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느낀 건
시간을 빌린다는 게 사람들에게 퍽이나 매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들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건지 아니면 딱히 아쉬울 게 없는 건지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고
지금 찾아온 사람 역시 몇 달 만에 온 손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함이 사무실을 채우기 시작하자
주인이 없는 사무실에 있는 두 명에게 어색함과 초조함이 찾아왔다.
조마조마함을 견디지 못한 둘은 이내 각자 행동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비서는 손톱을 깨물었고 후안은 손에 들고 있는 빵모자를 꾸기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비서의 손톱이 조금 짧아졌다.
애꿎은 빵모자는 3번쯤 꾸겨지고 펴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짧은 은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거기다 평상복 차림인 후안이랑 다르게 맵시 있게 차려입은 정장이
남자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비서는 설마 하며 문으로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손님인지 아니면 악마가 변신한 건지 헷갈렸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바로 후안이 앉아있는 소파로 향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실례했군요 손님이 온 줄 모르고 제 이름은 실브 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안은 실브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후안입니다. 반갑습니다."
악수를 나눈 둘은 자리에 앉았고 어정쩡하게 서있던 비서도 그제서야 안도하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에 얼떨떨해하던 비서는 곧 자신의 할 일을 기억해내곤
수첩을 펴 악마의 이름부터 의뢰인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실브는 다리 한쪽을 꼬면서 여유를 부렸지만
그의 외모와 차림에 기가 죽은 후안은 여전히 애꿎은 빵모자만 괴롭히고 있었다.
여기서 여유를 가지고 있는 건 자신뿐이라 느낀 실브는
미소를 지으며 비서가 앉아있는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차 좀 준비해주겠어?"
"아 예? 예"
내용을 적는데 몰두하고 있던 비서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하다
황급히 책상에서 일어나 서둘러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비서를 괴롭히는데 성공한 실브는 후안의 초조함을 덜어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시간을 빌리러 오셨죠?"
실브의 말이 반가웠던 후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예 혹시 시간은 어떤 식으로 빌릴 수 있나요?"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턱을 바친 실브는 잠시 고민하다
설명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후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엇 때문에 시간을 빌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이에요 시간을 빌린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거든요"
"음... 호기심이라"
침묵하던 실브는 이내 해결할 방안을 떠올렸는지 기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