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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의 한계2-실천이성비판의 유아론적 한계
게시물ID : phil_173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1
조회수 : 88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1/04/13 13: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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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를 밝힙니다. 남들에게서 칭찬을 받거나 선행이 나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된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도로에 있는 위험을 미리 발견하여 옆 차에게 경고해 주는 트럭기사, 그냥 지나쳐도 되는 상황에서 길잃은 아이에게 집을 찾아주는 어른, 위험한 상황에 빠진 사람을 자신이 위험할 수 있음에도 달려가서 도와주는 사람. 오히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상황임에도 돕는 사람이 많기에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설명은 쉽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종교에서는 이성으로만 되어 있는 신과 본능적인 욕구만 있는 짐승의 중간에 있는 그러니까 이성과 본능을 공유하는 인간이기에 자신의 욕구를 누르고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성선설을 주장하는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 사단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흄은 선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를 동정심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동정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죠.

 

흄의 동정성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인간의 감정은 변덕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맹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변덕에 따라 바뀌는 수동적인 윤리관이 아닌 보편적인 윤리관을 정립하기 위해 보편적 도덕법칙, 선험적 선의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어떤 행위를 평가할 때 결과가 아닌 의도가 선했는지를 묻게 되죠. 행위를 하게 된 원인이 동정심이나 자신의 이득이 아닌 보편적 도덕법칙에 따라 행해진 행위만이 선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 도덕법칙에 따라 선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 사람을 돕지 않으면 저 사람은 많이 힘들거야 혹은 저 사람이 나한테 고마워 할거야 같은 ~이면, ~할거야 라는 가언명제가 아닌 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땅히 ~을 해야하기 때문에 ~을 한다는 정언명제에 따른 행위가 선행이라는 것이죠. 전에 쓴 글에서는 보편적 도덕법칙이 결국 부모와 사회가 형성하는 가치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 선의지라는 것도 기존 사회의 가치관을 체득하여 형성한 초자아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글을 썼습니다.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비판은 그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흔히 비슷하게 사용하는 윤리와 도덕을 분리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선과 악(good & evil)을 판단하는 기준이 도덕이고, 좋고 싫음(good & bad)을 가르는 기준을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이라는 개념은 개체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개념으로 사회가 개체에게 강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유교사회에서 여자는 삼종지도를 지켜야한다거나, 남자는 우는 것처럼 감정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할 수도 있고, 종교 사회에서는 안식일을 지키고 신이 인간에게 하라고 시킨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을 도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선악이라는 것은 개체적인 차원이 아닌 공동체의 이득을 위해 개인을 억압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죠. 스피노자는 그러면서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마주침을 하게되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기도 하고 슬프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기쁨이 생기는 마주침을 코나투스가 증가하는 상황, 슬픔이 생기는 마주침을 코나투스가 감소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하면서 코나투스가 증가하는 마주침을 더 많이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윤리라고 하게 됩니다. 샤리아법을 어긴 여동생을 명예살인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지만 윤리적으로는 나쁜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정리해보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회 공동체적 관점으로는 도덕판단이 가능하고, 개별 주체 관점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의 실천이성과 관련된 도덕, 윤리관은 다분히 선악의 개념이지 호오의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회공동체적 관점에서 볼 문제인 것이죠. 하지만 칸트는 개별 주체의 도덕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선악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칸트의 도덕, 윤리관은 지극히 유아론(唯我論)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 공동체에 적용되는 선악의 개념을 유아론적 관점에서 봤다는 것은 오류라고 볼 수 있겠죠.

 

주체 내면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가 전제되는 도덕적 문제를 유아론적으로 바라보면 타인의 입장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칸트는 자율적 주체로서 도덕판단이 가능하고 그러므로 결과보다는 의도를 중요시 합니다. 하지만 내가 선의를 갖고,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입법자 입장에서 한 행위가 남에게는 나쁜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부상자를 돕겠다고 들쳐 업고 뛰었지만 경추 손상이 의심되는 상황이라 사지마비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돕겠다는 선의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죠. 취직을 못한 조카에게 명절에 조언을 해주지만 그 조언이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조카를 더 주눅들게 하는 결과만 낳을 수도 있죠.

 

칸트의 자율의 윤리학은 현대의 질서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자율적인 주체를 긍정함으로써 법을 만들고 적용하고 집행하는 근거를 만들었으니까요. 하지만 자율적인 주체가 결국 고립된 자아라는 사실은 칸트의 윤리학에 한계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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