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는 일반성과 특수성이라는 개념이 개별주체를 소외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보편성과 단독성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일반성과 특수성이라는 것은 개별주체자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둘이 비슷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군인이라는 일반성과 17사단 소속 부사관이라는 특수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보편성과 단독성은 군인이라는 보편성과 김정규 중사라는 개별자를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특수성과 단독성은 교환가능성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어린시절부터 애지중지하던 애착인형에 이름을 붙이고 상상의 인격을 부여한 인형은 교환이 불가능 합니다. 너무 낡아서 엄마가 갖다 버린 후 똑같은 인형을 가져다 준다고 새인형이 애착인형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죠. 나치 지휘관이 유대인 3명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하는 벤야민, 아인슈타인, 아렌트를 데려와도 되고, 스필버그, 주커버그, 스칼렛 요한슨을 데려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유대인 세명이라는 특수성만 있으니까요. 특수성과 단독성에는 이렇게나 건너기 힘든 큰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B중대를 적진에 돌격시켜서 모두 전멸했다고 해도 다시 예비대 D중대를 그 자리에 대체할 수 있다는 교환가능성. 그 구성원 하나하나가 고유한 역사를 가진 개별자라 교환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단독성. 필연적으로 특수성으로 세상을 본다면 인간성은 위축되고 개성은 무시되며 개별자는 폭력적으로 다뤄지기가 쉽겠죠.
영화를 보면 대체로 정의의 편에 서있는 주인공과 그 동료들은 각각의 개별자를 구별하기 좋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라도 사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머리띠를 하거나 방탄에 특별한 문양을 갖고 있거나 상의탈의를 하고 있거나 다리를 걷고 있고 아니면 파워레인져같이 아예 색으로 구분을 하기도 하죠. 그에 비해서 적들은 철저하게 개성이 없습니다. 똑같은 군복, 혹은 똑같은 꾀죄죄한 넝마를 걸치고 나타나죠. 영화 이퀼리브리엄, 파워레인져, 각종 좀비영화, 퍼시픽, 라이언일병구하기 등등 거의 모든 영화 드라마에서 볼 수 있죠. 주인공들은 개인의 역사, 고뇌, 의지를 각각 드러내야 하는 주체이고, 적들은 개성을 없애서 동일하게 보여야 보기에 편하고 비극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니까요. 주인공의 본질은 관객으로 하여금 나와 동일시하고 그들의 고민을 나누는 능동적인 존재이고, 적들의 본질은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적들의 본질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각각의 인생에 주인공이 되고 싶고, 실제로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갖은 자들의 고뇌가 시작됩니다. 개별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능동적인 삶을 영위한다면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제 각각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니까요. 더 무서운 것은 구성원들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권력을 잡은 자가 주연이 되고 국민들은 철저한 조연이 되었던 전형적인 예가 독재정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일자의 권력. 단 하나의 권력아래 대다수의 국민은 조연으로써만 역할을 하게끔 강제되는 순간이 바로 독재국가, 국가사회주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 치하에서의 국민들은 주인공이 되고자,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저항을 합니다. 거의 모든 독재를 경험했던 유럽, 한국, 중동 등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죠. 간단하게 말하면 독재자들은 개인들이 생각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받는 사태를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게 되면 독재로부터 가장 멀리 가게 되는 것이죠.
특히한 것은 나치 정권입니다. 나치 정권의 독일은 전형적인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져 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독재정권과 다른 것이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부분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히틀러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죠.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에서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이 곧 '작은 히틀러'라고 생각하며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치정권하의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히틀러로부터 찾은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히틀러는 존재가 되고 그 존재가 있어야만 개별자들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죠. 개별 국민들의 개성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히틀러를 치환시킨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독재자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항이 없는 독재를 만들어낸 것이죠.
히틀러가 히틀러와 독일 국민을 동일시하게 하면서 개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썼던 전략은 존재-존재자-존재자의 인식이라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었습니다. 빛이라는 존재자를 드러내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책상이라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아리아인의 영광이라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독일 국민의 정체성이라는 존재자를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도식인 것 같습니다. 존재의 자리에 신을 넣기만하면 아퀴나스나 신이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버클리의 논리와 비슷해 집니다. 나치 정권 당시의 광기가 종교적 광기와 비슷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셈인듯 합니다. 종교가 절대자 하나님의 말씀에 맹목적인 것처럼 독일 국민들도 자신이 히틀러고 히틀러가 나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었던 것이죠.
초월종교는 인간의 개성을 부정합니다. 인간의 본질이 있는 존재로 봄으로써 목적론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죠. 인간은 다른 사물과 같이 어떤 특정한 본질을 가진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각자의 개성보다는 본질에 맞는 삶을 살 것을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연유되었을 것입니다. 유니폼만큼 개성을 부정하는 것도 없을 테니까요. 신 앞에서 경건하고 겸손해야하는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종교적 입장은 인간을 단독성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닌 특수성을 가진 존재로 봅니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틀에 맞춰 인간의 모습을 끼워 넣고 개성은 철저하게 잘라내는 것이죠. 그리고 유발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생각을 하지 말것을 원합니다. 생각은 신과 신의 대리인 사제들의 역할인 것이죠. 단독성, 개성의 부정은, 일반성과 특수성만 인정하는 것은 독단과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이 필연적이죠. 역사에서 무수하게 종교의 몰개성에 의한 폭력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만 문제는 아닙니다. 개별자의 단독성이 존중이 된다면 어떠한 폭력도 일어나기는 힘듭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유대인 13번을 스피노자라고 보지 못하고 단지 유대인 13번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집에서 빵 팔던 잘 웃던 빵집 아저씨 스피노자가 아닌 유대인 13번이니까 죽일 수 있었던 거죠.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2사단을 몰아넣어 전멸에 가깝게 만든 것은 대본영에게 2사단은 숫자였지 개별자기 아니었기 때문이죠. 내가 내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희생으로 삼는 여성이 개별자로서 역사를 가진 소중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강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독재와 폭력의 가장 먼 곳에 들판에 핀 각양각색의 개성있는 들꽃의 이미지를 지향하는, 나름 꾸미지 않고 자기만의 색과 향을 뽑내는 화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