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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4편
게시물ID : readers_355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낮에나온달
추천 : 1
조회수 : 4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02 20: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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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묘한 느낌이 불러온 과거가 은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차에서 항상 운전에만 집중하는 남자친구 때문에

은희는 늘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느긋하게 걷는 걸 좋아하는 은희랑은 다르게 남자친구는 발걸음이 빠른 편이었고

같이 걸을 때면 늘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손잡는 게 싫어져 늘 따로 걸었다.


별거 아닌 사소한 것들이 은희의 마음속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자신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물어보던 은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은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야 묻는걸 멈췄다.


"정말 미안해요"


거듭해서 사과하는 은철을 보며 

은희는 남자친구와 싸웠을 때가 떠올랐다.


싸우고 나면 남자친구는 며칠 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연락을 해왔고

늘 망설였지만 차마 헤어지잔 말을 하기가 힘들었던 은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렇게 쌓여왔던 감정들이 묵직하게 마음속에 쌓여있었다. 


"저 여자친구분한테는 잘해주셨나요?"


떠올리기가 괴로웠는지 은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글쎄요...잘해는 준거 같은데

그녀가 좋아하는 거라면 사소한 거 하나하나 적어둘 정도였거든요"


놀란 은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머... 대단하네요"


"어쩌면 저는 완벽해지려는 강박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직업도 그렇고 그래서 그녀의 행복을 맞춰주려 했죠 

그녀가 좋아한다 말했던 건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렇게 하면 사랑이 이뤄진다 믿었죠"


방금까지 남자친구 생각으로 인해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게 싫었던 

은희가 반쯤 농담을 담았다.


"그런 얘기 저한테 해봐야 소용없어요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닌걸요"


"알아요 그러니까 말하는 거예요 의사한테 말하면 저는 환자가 되잖아요"


은희의 기분을 눈치챈 은철이 농담을 받자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잠시동안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가시고도 은철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었다.


"근데 정말 괜찮아요? 다치지 않으셨어요?"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본 은희가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아픈것도 없고요 음..."


고구마 스틱을 먹어서일까 아니면

가득하던 고민을 좀 비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일어나서 한 끼도 안 먹어서 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지금에 와서야 은희를 허기지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말을 툭 내려놓은 은희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정 미안하면 밥이나 사주세요"


얼떨떨해하던 은철이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예 뭐 좋아하세요?"


"은철씨는요?"


"제가..."


굳이 이런 걸로 자존심 내세울 필요가 있나 싶었던 

은철은 내뱉던 말을 다른 말로 바꿨다.


"저는 김치찌개 좋아해요"


"저는 수제비요"


"그럼 다음 휴게소에서 멈춰야겠네요"


습관처럼 은철은 전 여자친구가 뭘 좋아했는지에 대해 생각했고

이미 외우고 있던 거라 반사적으로 스파게티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가 뭐 먹고 싶냐 물을 때면 은철은 반사적으로 스파게티를 먹자 대답했다.

그러면 그녀는 늘 질색하며 다른 메뉴를 제안했고

은철이 하는 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항상 그녀가 이끌었던 데이트는 곧 진부해지곤 했다.


"실례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실례면 안 묻는 게 맞지 않을까요?"


"으음"


입은 다물었지만 은철의 표정에는 괴로워하는 게 선명히 드러났고 

은희가 짓궂게 웃었다.


"말해봐요 뭔데요?"


"지금 남자친구 정말 안 좋아하시나요?"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었기에 은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조금 전에도 남자친구와 추억을 떠올렸었던 은희는

몇 가지를 더 불러왔다.


'나는 정말 행복했을까?' 


추억 속 자신의 얼굴은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진 것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표정은 아니라 확신했고 그제야 은희는 스스럼없이 답할 수 있었다.


"네... 정말로 안 좋아하네요"


은희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리고 침묵을 밀어낸 건 고민하고 있던 은철이었다.


"저는 정말 그녀를 사랑했을까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은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은철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는 사랑한다 믿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 감정을 사랑이라 확신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죠

그래서 헤어졌을 때도 슬퍼했죠. 아니 슬픔을 가장했습니다. 

근데 지금 은희씨랑 얘기하면서 느꼈어요 

내가 그녀를 정말 사랑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쩌면 사랑했지만 식은 건지도 모르죠

그녀도 아마 내가 주는 게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복수한 거겠죠"


은철의 말에 은희는 불쑥 지금 남자친구에게 맞추기만 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은철씨가 뭐라 생각하든 그 여자는 정말 사랑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요"


오랜만에 온기가 은철의 가슴을 채웠고 

온기 때문인지 은희를 바라보던 눈빛이 따뜻해져 갔다. 


은철이 자신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은희도 깊이 공감했다.


"나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직도 결혼하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하죠

사귀게 된 것도 청혼을 받은 것도 단지 끈질기게 매달렸기 때문이었어요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죠

하지만 항상 그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은 늘 공허했어요

일할 때보다 더 힘들었고 집에 오면 늘 침대에 몇 시간씩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죠

저도 은철씨랑 얘기하면서 알았어요

만약 그 사람이 저를 정말 사랑했다면 사소한 것들에 귀 기울여줬을 거란 걸"


은희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은철이 몇 번을 머뭇거리다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결국 상처는 다르더라도 아픔은 비슷한 셈이었다. 


그 후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은철은 차를 조용히 휴게소 쪽으로 돌렸다.

평일의 휴게소엔 사람들이 드물어 조용한 편이었고 

식당엔 띄엄띄엄 앉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만이 바쁘게

허겁지겁 식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은철은 공허한 눈으로 휴게소를 둘러보다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요"


"글쎄요 우리처럼 어디로 가는 거겠죠"


고개를 끄덕이던 은철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바다에 가고 있죠"


"저는 떠밀려서 중국으로 가고 있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쓸쓸히 미소를 지었다.

식권 자판기에 고장이라는 A4용지가 크게 붙어 있었고

둘은 할 수 없이 카운터로 향했다.


"뭐 드릴까요?"


"수제비" "김치찌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좋아하는 메뉴를 반대로 말한 둘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아주머니가 둘을 번갈아가며 보자 은철이 빠르게 수습하여 입을 열었다.


"수제비랑 김치찌개 하나 주세요"


은철이 물을 떠오는 동안 은희는 수저를 테이블에 놔두기 시작했고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러웠다.


한식 코너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번호가 동시에 전광판에 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난 둘은 같이 가서 나온 음식을 받아들었다.


"어휴 부부가 보기 좋네! 휴가내서 여행 가는 거야?"


평소라면 바빠서 말도 안 걸었을 아주머니가 한가해서 그런지 둘을 보며 말을 걸었고 

은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하하..."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은철은 조용히 자리로 와 

자신 앞에 놓인 쟁반을 은희랑 바꾼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요 수제비 좋아하잖아요"


"고마워요... 식당 아주머니가 참 짓궂네요"


"그러게요 저는 괜찮은데 은희씨가 기분 나빴겠네요"


"아뇨 저도 괜찮아요"


음식의 열기 때문일까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일까 얼굴이 빨개진 둘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수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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