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위치부터 보시면 프랑스 바로 맞은 편입니다. 지중해만 건너면되구요. 프랑스가 132년 동안이나 개간을 하고 많은 공장들를만들어 식민지 해왔으며 프랑스 본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외인부대 또한 1831년 루이필리프가 알제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용병대대가 시초였습니다.
프랑스는 영국, 일본제국주의와 비교해도 그 정도가 매우 악질적인 방법으로식민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알제리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슬람교를버리면 시민권을 준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비참하고 가난한 상태로 내버려두고 무력으로 강하게억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세계2차대전에서 독일에게 프랑스가 점령되었고, 1945년 5월8일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이 승리하자 우리의31운동처럼 수많은 알제리인들이 자국의 독립을 주장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습니다. 진압하려는 프랑스 군경과 시위대간에 전투가 발생해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알제리의 깃발을 들었던 12세 소년 ‘사르 알 부지드’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하자 군중들은 분노했고이 소녀는 알제리 독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계엄령을 선포한 후, 프랑스 정규군, 외인부대, 알제리인 식민지 부대,이탈리아 포로, 백인 민병대를 총동원해서 잔인하게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양함의 함포과 폭격기로 비무장의 마을들을 공격하여 전쟁의 시작과 함께 순식간에 4~5만명의 민간인을 일거에 학살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프랑스는가장 잔인하게 식민지를 운영했던 국가같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때 강제로 일본군에 징집당했던 조선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알제리인들도유럽과 베트남등에서 프랑스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향인 알제리에 돌아왔더니 발견한 것은학살된 수만명의 동포들과 폐허가 된 마을들 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알제리인 예비역들이 ‘알제리 민족 해방 전선(FLN)’에 들어가서 프랑스에 총부리를 돌려싸우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부터 1954년까지는소강상태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며 달래려 했는데 실상은 13%에 불과한 백인 주민들에게50%의 국회의원 의석을 배정하고 부정선거로 알제리 지배권을 이어갔습니다. 당연히 알제리인들은 격분했죠.
1954년 ‘디엔비엔푸’ 포위전에서 베트남군은 프랑스군 몰래 산위로 대포와 각종 군사장비를 실어날라 준비했다가, 일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프랑스군을 털어버렸고,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알제리인들도 독립의 의지가 어마어마하게 고무되었습니다.
같은 해, ‘알제리 민족 해방전선(FLN)’이알제이의 독립을 선포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알제리 동포들의 뜨거운 지지와 지원으로 게릴라전을벌이던 FLN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테러와기습에 시달리며 서서히 전력이 소모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프랑스군들은 FLN보다 더 심하게 고문하고 학살하는 전술을 썼습니다. 구글에서 알제리프랑스 전쟁으로 검색해보면 수없이 많은 사진들이 나옵니다. 2007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친밀한 적’을 보시면 알제리전쟁에 참전했던 평범한 프랑스 젋은이들이어떻게 변해가는지 굉장히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했던 잔인하고 악마같았던 일본군의 모습이 그대로 나옵니다. 자른목을 들고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프랑스군, 강간해서 살해한 알제리 여인을 사냥한 사슴처럼 들고 찍은사진들, 학살한 시체를 쌓아놓고 자랑스럽게 찍은 사진들, 그들의잔인함에 머리가 띵해질 정도였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존재라는 ‘성악설’을 믿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1961년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알제리인 4만명이 평화시위를 했는데 200명의 시위대가 프랑스 결찰의 곤봉에맞아 죽고 총격에 사살당했습니다. 수십명은 목이 졸려 사망했고, 강제로물에 던져져서 익사 당했습니다. 바로 1961년의 ‘파리학살’입니다. 예술과문화의 도시 파리에서 벌어진 추악하고 미개한 학살사건이었죠.
어마어마한 전쟁범죄를 자행하던 프랑스에 분노한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이 알제리 독립전쟁에 관여하기 시작하자 미국은알제리 독립을 받아들이라고 프랑스를 압박합니다. 잔인한 전쟁의 양상에 분노한 프랑스군들이 탈영해서 알제리민족해방 전선(FLN)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알제리 독립을 지지하는 좌파와 진압해야 한다는 우파로 여론이 나뉘어져 극렬하게 대립했습니다.
1958년 프랑스 정권이 제5공화국으로바뀌었습니다. 군부가 쿠데타로 드골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 이었습니다.그런데 드골은 1961년 알제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했습니다.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군부는 분노했죠. 대한민국의 육군내 비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같은 프랑스군의 비밀 사조직인 OAS가 쿠네타를 일으켰습니다. 알제리에 주둔중이던 공수부대와 외인부대를동원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드골의 라디오 방송으로 반란은 실패했으나 반란의 잔당들은 드골 암살을 시도하고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서로 싸우던 프랑스군와 알제리군이 협력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됩니다. 반란군을 진압한 드골은 알제리에게 3가지 옵션을 줍니다. 프랑스의 한주가 되어 프랑스인과 같은 혜택을 받는 것, 프랑스의자치 공화국이 되는 것, 국민투표를 통해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는 것.여러분이 알제리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알제리는 3번째 완전한 독립을 선택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알제리는 34만명의 병사중 사망 15만명, 부상 16만명이었고, 민간인은 무려 200만여명이 학살당했습니다. 무려 200만명!!! 프랑스는87만명이 참전해서 사망 12만명, 부상 6만명, 알제리에거주하던 프랑스인 3천명이 사망했습니다.
,독립이후 알제리 남아있던 프랑스의 흔적은 싸그리 지워지고 공산주의국가가 되었습니다. 특히 ‘아르키’라고 불리우던 알제리계 프랑스군인들과 가족 15만명은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죄뢰밭으로 내몰리고, 광장에서 맞아죽고, 총살당하고, 교수형당하고, 화형당해서시체가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이때 살해당하지 않고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로 건너간 알제리인들중에‘지네딘 지단’의 부모님도 있었습니다. 지단이 축구경기에서 자랑스러운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열창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 아실 수 있겠죠? 프랑스가 나치 협력자를대숙청하고, 알제리가 프랑스 협력자를 대숙청했던 것 처럼, 우리도친일 부역자들을 대숙청했어야 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참고로 저는 독립운동하신 분들의 후손입니다.^^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