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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의 한계, 자유에 대하여
게시물ID : phil_173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1
조회수 : 70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01 13: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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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를 꿈꾸는 철학자였습니다. 일자의 철학 혹은 초월적 본질을 긍정하는 철학에서는 존재의 자유를 긍정하기 힘듭니다. 일자를 위하여, 이데아를 탐구하기 위하여, 신을 경배하기 위한 존재가 있을 뿐이지 자유로운 존재를 상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상은 앉아서 책을 보기 위해 만들어진 본질을 가지고 있고 물병은 물을 담아두기 위한 본질을 가지고 있어서 본질을 긍정하는 사유체계에서는 그 외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것은 인간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고민이 깊어진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무'를 통하여 다른 사물과는 다르게 자유로울 수 있는, 자유라는 저주를 받은 존재라는 주장을 폅니다. 사르트르의 예를 살펴보면 카페에 서있는 웨이터는 웨이터의 본질이 있어서 웨이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웨이터하고 아무런 접점도 없습니다. 웨이터를 하고 있는 저 청년은 그냥 하나의 인간이고 웨이터와 같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퇴근을 하면서 웨이터 옷을 벗는 순간 그의 미래는 그의 의지로 작동을 하는 것이며 웨이터 일을 하는 순간에도 웨이터라는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언제든 웨이터를 그만두고 사진작가가 될 수도 있고 학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그 웨이터는 분명히 자유롭게 진상부리는 손님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냥 앞치마를 던지고 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죠.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우리도 일하다 때려치고 싶을 때, 공부하다 관두고 싶을 때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렇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부모님으로 부터 학대를 당한 후 늙으신 부모님을 봐도 내 자유대로 그들에게 맞서지 못하기도 하고 학폭가해자를 성인이 되어 만나도 주눅들기 쉽습니다. 누군가 카페 테이블에 놓고간 노트북을 보고 충동이 일지라도 감히 가져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르트르의 말대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것처럼 이미 정해진 답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단말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서양철학에서 자유를 논할 때, 아니 어떤 이슈를 논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 칸트의 입장을 살펴 봅시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를 '한 상태를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 때 일의 경과는 인과율을 따르더라도 한 계열의 시작을 하는 능력은 자유라는 것이죠. 모든 사건과 작용은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데 그 원인을 끝까지 추적했을 때 맨 처음 시작의 원인은 자유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전에 제가 썼던 글에 들었던 예를 다시 언급하면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는 상황을 봅시다.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불을 켭니다. 불을 켜면 물의 온도가 올라가서 커피가 만들어집니다. 커피를 끓게 하는 원인은 불이 되고 불이 켜지는 원인은 내가 불을 켰기 때문입니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계열의 시작은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만들겠다는 나의 자유의지!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인간은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사유하여 자신의 행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바로 생각과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칸트의 자유는 얼마 가지 않아서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정신분석학 특히 프로이트는 칸트가 말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착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인간은 부모나 사회로부터 바람직한 가치관을 주입받게 되고 그것이 초자아를 형성하여 초자아가 인간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실천의지라는 것도 초자아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침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생긴 실천의지도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 좋다는 인식과 아침부터 일찍 각성을 해야한다는 사회적인 상황에 따른 결정이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초자아의 개념은 이미 오래전 동양에서 먼저 사유되었습니다. 반수반두의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알라야식이 바로 초자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경험이 쌓이고 쌓여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들을 알라야식이라고 합니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8식으로 분해합니다.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촉감의 의식이라는 다섯가지 감각의식. 그리고 감각을 지나 개념 혹은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뜻의 의식, 그리고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자의식을 지나 가장 깊은 곳의 무의식을 알라야식이라고 합니다. 감각의식도 순서대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먼 상대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들을 수 있으며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지려면 더 나와 가까워져야 하는 것이죠. 알라야라는 말은 저장한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입니다. 눈을 뜻하는 '힘'과 합쳐져 히말라야라는 말이 되면 눈이 저장되어 있는 한문으로 설장산이 되죠.
 
바수반두가 알라야식에 집중한 이유는 궁극적인 자유를 꿈꾸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는 불교에서 알라야식이야 말로 넘어서야하는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참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알튀세르가 말하는 구조를 넘어야하고 나의 무의식도 넘어야 하는 것이죠.
인간이 잘못을 했을 경우에 책임이 생기는 것은 칸트적인 자율이 전제가 되어 생기는 개념입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죠. 사회 구조적인 관점, 개인의 역사에 대한 관점은 무시하고 개인에게 온전히 책임을 물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에게만 온전하게 범죄의 책임을 물릴 수 있을까요? 모든 어려운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범죄에 내몰리는 사람과 전혀 범죄를 저지를 사정이 없었음에도 더 큰 탐욕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같게 처벌하거나 오히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되는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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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
2021-04-01 13: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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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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