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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한계, 지향성
게시물ID : phil_173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1
조회수 : 72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01 13: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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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고대 이후로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변화되어 오던 서양철학을 거의 통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으로 만든 철학자 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정류장 혹은 저수지라는 별명이 있죠. 거의 모든 서양철학은 칸트에게서 모여 정리, 통합되어 다시 여러갈래로 갈라지면서 다시 갈길을 가게 됩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인간의 인식능력 즉 위를 판단하는 이성에 대한 관심, 인간의 윤리적인 판단능력 즉 악을 판단하는 윤리적 관심,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즉 추를 판단하는 무관심에 관한 설명입니다.

 

고대 이후로 진선미는 공동체에서의 조화를 위해 선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평가되어오던 것이 칸트를 만나 세가지 관심으로 혹은 관점으로 따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세가지 안경을 만든 셈이죠. 고대, 중세의 사상이나 예술은 선을 중심으로 진과 미를 통합하여 플라톤은 모든 이데아의 궁극적인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라고 하였으며, 중세 예술가들도 아름다움과 황금비라는 수학적인 이론을 그림에 담기 위해서도 선한 메세지를 넣어야 했습니다. 칸트는 진선미를 분리하여 세가지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철학자 강신주가 들었던 예를 언급해보면 우리가 길을 가다 우연히 젊은 남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죽은 흔적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장면을 순수이성비판의 시각에서 보면 떨어진 위치의 높이, 중력가속도 등을 계산하여 충격량을 알아볼 수 있고 소생가능성을 계산하는 입장입니다. 실천이성비판 즉 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 남자가 뛰어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사회현상이나 개인적인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죠. 판단력 비판 즉 미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어 있는 사체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혈흔에서 느와르적인 미적 유혹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식에 관한 순수이성비판을 아주 간략하게 보면 칸트는 인간의 인식은 두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대상을 감각하는 직관, 그리고 직관된 대상을 오성을 통해 인식하는 범주화, 혹은 개념화 입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하는 경험주의적인 직관과 인간은 선천적으로 경험없이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합리주의적인 범주화를 통해 인식이 가능하다고 하여 감각차원에서는 경험주의를 긍정하고 오성차원에서는 선험적 인식체계를 주장하여 합리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칸트의 인식론에 관하여 더 간단하게 보면 우리는 출근길에 보이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고 그 표지판이 직관이 되면 우리의 오성을 자극하여 표지판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순서적으로 직관이 있고 인식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후설은 그 순서를 부정합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표지판이지만 그 표지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눈이 아니라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찾고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길에 보이는 잡초가 우리에게 인식이 되려면 보이기 때문에 인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에 잡초를 떠올리고 잡초를 찾아서 봐야 잡초가 눈에 들어오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철을 타던 버스를 타던 엔진소리가 귀에 성가실 때가 있고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버스를 타더라도 엔진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관심이 엔진소리에 집중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것이고, 아무리 시끄러운 공장 한복판에 있더라도 동료의 속삭임에 집중하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무실 밖에서 떠드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싶으면 그쪽으로 귀를 기울이면 들을 수 있고 업무에 집중하고 있으면 그 소리는 들을 수 없죠.

 

동양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인식작용에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불교 6조 혜능의 일화를 보면 인식에 대한 마음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법당 바깥에서 두 무리의 스님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고 한 무리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또 한무리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 때 혜능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고 마음이다'라고요. 그 스님들이 깃발과 바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움직이는 것은 없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또한 심즉리,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있다고 말하는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의 일화도 있습니다. 왕수인은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깊은 산속에서 저절로 피어나 저절로 지는 꽃은 존재하는데 그게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왕수인은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이 꽃의 모습은 일시에 분명해진 것이네. 이로부터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 꽃을 보지 않았다면, 그 꽃의 존재를 마음에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 꽃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하여 칸트의 위대한 업적인 진선미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인식 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후설에 따르면 지향성 없이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항상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기사를 찾아보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보고 들을 때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지향하는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죠. 그것은 문제도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의 인식이 건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보완
2021-04-01 13: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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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강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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