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던 은철은
대답하기 위해 상처속을 헤매였고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급속도로 우울해져 갔다.
헤어진 날을 떠올리자 헤어졌다는 단어가 은철 자신에겐 사치스러웠다.
자신처럼 비참하게 버려진 사람은 헤어졌다라는 말보단 다르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굳이 은철은 은희의 말을 한번 정정했다.
"헤어지기보단 차였습니다.
일이 생겨서 한 달 동안 소홀했는데...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더라고요보기좋게 차였죠 하하..."
"어머 얼마나 사귀었는데요?"
굳이 꼬박꼬박 끼어드는 악취미는 없었지만 당하기만 하는 악취미도 은철에겐 없었다,
"이번엔 제 차례예요"
"좋아요 질문해요"
은희가 말했던 좋아하진 않지만 이란 말이 자꾸 은철의 머리속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그거에 대해 물어볼 방법이 없었던 은철은 그냥 통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가는 길이예요?"
그러나 이 간단한 질문은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던 은희에겐 대답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몇번이나 입술을 떼며 머뭇거리던 은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중국이요... 결혼 때문에 남자친구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가야 하거든요"
"좋아하지 않는다면서요?"
놀란 은철이 황급하게 묻자 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제 차례거든요"
한 방 먹은 은철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 사귀었어요"
"어머 5년이나 사귀었는데 꼴랑 한 달 소홀했다고 바람을 펴요?"
이태까지 차인 게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던 은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소홀했으니 그랬...겠죠?"
"아니에요 은철씨는 잘못이 없어요 그 여자 분명 후회할 거예요"
은철은 고개를 돌려 은희를 보았다.
햇볕이 그녀만 비추는지 갑자기 환하게 보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긴요 근데 진짜 그 여자 나쁘네요...
그래서 이 책 산 거예요?"
은희가 독신주의자가 되는 법이란 책을 가리켰고 부끄러워진 은철이 고개를 숙였다.
"5년의 시간이 버려지자 불신이 팽배했죠 사람도, 사랑도 믿기가 힘들더라고요
서로 사랑한다 믿었지만 그건 제 생각뿐이더군요"
잠시의 부끄러움을 견뎌내자 은철도 조금은 짓궂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데 왜 결혼하는 거예요?"
배신감을 느낀 은희가 황급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방금까지 고맙다고 해놓고선 이렇게 상처를 후벼 파다니...
나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집안에서 떠밀었거든요
거기다 5년이나 절 따라다니기도 했고요..."
서로의 쓸쓸함이 다를 텐데 은희의 말투에서 묻어나는 감정이
은철을 지독히 공감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은철은 성급하게 대답의 꼬리를 물었다.
"왜 그만뒀는데요?"
"제 차례예요"
은철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엔 자신이 궁금증을 유도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유도당하고 있었다.
"공무원이요... 꼴랑 백수인 그놈보단 제가 나을 텐데 뭔가 부족했나 봐요"
"흥! 직업 물어보려 안 했거든요"
"아 그래요? 그래도 대답했으니 대답해줘요"
새침한 표정을 지은 은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싫어요 질문할거예요 어디 가세요?"
당했다는 표정을 지은 은철은 할 수 없이 한숨을 길게 쉬며 대답했다.
둘 다 상처받은 영혼이었기에 어디를 건드리든 아팠다.
"보라카이요 그녀와의 추억이 없던
새로운 바다를 보고 싶었거든요"
"우와... 낭만적인데요"
내뱉으면서 문득 유치하단 생각에 사로잡혔던 은철이 은희의 말에 놀라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음에 내뱉을 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듯 은희의 표정은 우울에 젖어들고 있었다.
"평소에도 말 지지리 안 듣는 놈이 어느 날 반항하길래 끝나고
교실 청소를 시켰는데 어머님이 절 찾아왔어요
방과 후 청소 때문에 자기 아들이 학원 못 갔으니 책임지라며..."
그때 일이 떠오른 은희는 잠시 말을 끊고 그 학부모와 학생을 향해
다시 한 번 저주를 퍼부었다. 어찌 보면 이리 중국에 끌려가는 것도 그 둘 때문이었다.
말하기가 좀 껄끄러워서 끊고 싶었는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은철의
시선을 차마 외면하기가 힘들었던 은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머리채까지 잡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것 때문에 저만 징계를 먹었고 반발심에 그만둬버렸죠"
"그걸 가만 내버려뒀어요?"
갑작스레 흥분한 은철의 목소리에 당황한 은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안타깝다고 말한 게 전부였던 남자친구와 달리 은철은 자기 일도 아닌데
은희 자신보다 더 흥분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같이 머리채를 잡고 싸워야죠 아니 머리카락이 아까우니까
그냥 떡 화장한 얼굴을 주먹으로 갈겨주지 그랬어요"
은철의 말에 통쾌해진 은희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떡 화장한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순간 은철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해보니 떡 화장한 여자한테 차인 건 자기였는데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기에
은철은 흥분을 돋우며 다시 이어갔다.
"그런 여자들이야 뻔하죠 그리고 억울한 건 은희씨인데 왜 징계를 먹여요
그 대머리 교장 가발을 벗겨가지고 사직서로 찰싹찰싹 때려주지 그랬어요"
"뭐? 뭐라고요? 푸하하하 그만해요 배 찢어지겠어요"
은희는 몸을 숙인 채 배를 잡고 끅끅거렸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지 모르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통쾌하면서도 시원하게 다가왔다.
"억울하잖아요 그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실제로 하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지금은 진짜로 배 찢어져서 웃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은희가 웃는 걸 보니 은철도 진짜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 들어
조금은 후련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거 같았던
은희는 숨을 길게 내쉬며 호흡을 한번 골랐다.
생각해보니 쓰러지면 공항에 안 가도 된다는 생각이 드니 쓰러지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보니 자신이 얼마나 가기 싫어하는지에 대해
은희는 다시 한 번 확신이 들었다.
"그러게요 멍청했네요"
"세상 떠나갈 거 같은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눈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은희가 대답했다.
"은철씨도요"
얼떨떨해진 은철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졌다.
무안함은 금세 찾아왔고 은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사실 교사도 집안에서 떠밀려서 강제로 가지게 된 꿈이었어요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예요 집안에서 주선한 맞선에 의해 만나 거였으니까요"은희는 은철을 보며 생긋 웃었다.
"됐죠? 공무원이라 대답해준 대가예요"
머릿속에 먹구름이 걷혀버린 은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 은희의 표정을 따라 지었다.
이야기를 하며 마음속에 먼저처럼 쌓인 전 여자친구와의 부스러기를
태워버리고 싶어진 은철은 담배 욕구가 간절해졌다.
핀다고 나아지는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잠시나마 의지할수는 있었다.
잠시 바깥공기를 쎄고 싶다며 은희에게 돌려 양해를 구하자
마침 같은 마음이였던 은희가 선선히 승낙했다.
차를 돌려 가까운 휴게소에 멈춰선 은철은 화장실을 가겠다며
먼저 휴게소 쪽으로 걸어가는 은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