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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전쟁, 악마같았던 영국! (feat. 영화 디스트릭트9)
게시물ID : history_301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재즈매니아
추천 : 2
조회수 : 183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1/03/25 00:41:47

2009년 개봉한 ‘디스트릭트9’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 흑인, 백인을 보면 오묘한 인종간의 갈등이 보입니다. 백인간에도 영국인,보어인의 차별이 있고, 백인에게 차별받던 흑인이 외계인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중 하나인 디스트릭트6을 숫자6만 뒤집어 디스트릭트9로 만들어 풍자하고 있죠.

남아프리카 지역은 1488년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주요 통로였던 희망봉의 발견으로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17세기 중엽부터  동인도회사를 세운 네덜란드인들이 케이프타운 일대에 식민지를 만들고 많은 수가 정착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근처에 살던 흑인, 코이코이족을 노예로 부리며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보어(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장주’를 의미합니다.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침공하여 통일하면서 네덜란드도 나폴레옹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이때를 노린 영국이 '얍삽하게'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지역을 '낼름' 접수해버립니다. 영국의 침략에 분노했던 네덜란드 출신, 보어인들은 북쪽으로 이동해서 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을 1854년, ‘오렌지 자유국’을 세우게 됩니다.

영국은 처음에 이 두 보어인들의 국가를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렌지 자유국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당연히 침을 삼키고 있었겠죠? 1877년 남아프리카의 영국군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강제로 병합합니다. 60년뒤인 1937년 노구교사건이 떠오릅니다. ‘무다구치 렌야’장군이 독자적으로 중일전쟁을 시작했던 사건이죠.

1877년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병합한후 ‘줄루왕국’까지 점령했습니다. 영국군의 힘으로 적이었던 줄루족을 눌렀던 ‘이이제이’전략으로 기다렸던 보어인들이 1880년 폴 크뤼거 사령관의 지휘하에 영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1차 보어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붉은색 군복에 흰색 장구류로 진형을 만들어 이동하고 전투했던 영국군은 철저하게 은폐, 엄폐한 상태에서 평상시의 뛰어난 사냥솜씨로 저격하던 남아프리카 보어인들에게 전투력에서 뒤떨어졌습니다.

1881년 2월27일 ‘미주바 언덕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1차 전투에서 400명으로 전투를 시작한 영국군은 전사자 92명에 태반이 부상하고 포로로 잡혔는데, 트란스발군은 1명 전사에 5명 부상뿐이었습니다. 이어진 2차 전투에서는 영국군 1,200명 트란스발군 3천명이 붙었는데, 영국군은 전사자 400명, 트란스발군은 전사자 41명이었습니다. 영국군은 지휘관까지 전사하며 처참하게 패배했으며 1881년 3월23일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어 다시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1886년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근처에서 엄청난 규모의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9년뒤 1895년 트란스발 공화국에는 많은 영국인들이 금광,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하던 영국인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반란을 획책했던 영국의 시도가 실패하기도 합니다. 당시 대부분의 영국광부들이 이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99년 9월,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뻔뻔하게 모든 영국인들을 트란스발 국민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라고 최후통첩을 했는데, 트란스발 공화국은 48시간내에 철수하라고 호기롭게 응수했습니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의 공격으로 2차 보어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장거리 정확도가 떨어지고 흑색화약을 쓰던 영국제 소총으로 무장하고 전열 횡대전술을 쓰던 영국군은 클립으로 5발이 한꺼번에 장전이 되고, 유효사거리가 500m에 이르는 당시 최신형 소총이었던 독일제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동시에 기병을 이용한 기습, 위장하여 은폐, 엄폐한 상태로 저격하던 보어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최신형 무기를 보어인들에게 대량으로 판매했던 겁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아르헨티나에 많은 최신 무기를 판매했었죠? 1899년 12월10일 슈토름베르크 전투에서 영국군은 135명이 전사하고, 600여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12월11일에는 14,000명의 영국군이 킴벌리를 공격했는데, 참호에서 대기중이던 보어인들에게 기습을 당해 120명이 숨졌습니다.

12월15일 콜렌소 전투에서는 21,000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를 확보하기위해  투겔라 강을 건너다가 독일 무기회사 크루프의 최신 야포로 무장한 보어인들의 집중 포격에 노출되어 1,400여명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보어인은 40명이 사망했습니다. 해를 넘긴 20세기, 1900년 1월 영국은 다시 레이디스미스를 확보하기 위해 길목인 스피온 콥 고지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야간공격으로 점령했던 진지가 스피온 콥이 아니었고, 그곳은 보어인들이 최신형 독일제 야포로 정조준하고 있던 목표였습니다. 최신화약인 무연화약을 사용하고 있어 연기로 공격위치를 추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국군 사상자는 1,500여명, 보어인은 330여명이었습니다. 이때 사망한 영국군들중 리버풀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리버풀 FC 서포터즈의 이름이 ‘콥’ 입니다. (추모하기 위해서...)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막아냈던 소련군처럼 보어인들은 자신의 가족과 땅을 지킨다는 사명으로 정신무장이 되어있었습니다. 영국군의 처참한 패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그리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1900년 1월, 18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 남아프리카에 파병되었습니다. 이런 규모의 해외 파병은 영국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규모였습니다. 이 당시 참전했던 유명인인 윈스턴 처칠과 남극조난에서 리더십으로 유명한 셰클턴, 의무병으로 복무한 ‘간디’, ‘명탐정 홈즈’로 유명한 코난도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고무가 아닌 가볍고 보온, 통기성이 뛰어난 방수 ‘개버딘’소재로 된 ‘트랜치(참호)코트’ 버러리코트도 이때 개발되었죠.

18만여명의 영국군와 정상적인 전투로 승산이 없었던 3만여명의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설수 밖에 없었습니다. 1900년 3월 오렌지자유국의 수도가 함락되었고, 6월에는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도 함락되었습니다. 9월 영국은 두 국가의 완전점령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보어인들은 영국군들과의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도로와 통신선을 파괴하고 보급부대를 공격하는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실시했습니다. 보어인들은 전투지역에 부대를 파견할 때 해당지역 출신인들을 파견하여 지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국군들은 보어인들이 거주하던 모든 주택과 농장을 불태우는 초토화작전으로 보어인들의 게릴라전술에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수확을 완료한 농작물들도 함께 불태워버렸습니다. 거주할 곳이 없었던 12만여명의 보어주민들은 40여개의 강제수용소에 수용하고 통제했습니다. 아우슈비트나 위구르 지역의 강제수용소가 떠오르네요. 여성과 아이를 강제수용소에 수용하고 남성은 해외로 보냈다고 합니다.

당시 수용되었던 보어인들은 최악의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위생관리가 안되었던 것은 물론 식량배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수용인들을 가족중 보어군대에 참가한 이들과 아닌 이들을 분리하여 식량배급을 다르게 했습니다. 가족중 보어군대에 참가한 이들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식량배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28,000여명의 보어인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28,000명 입니다!!!  영국에 의한 계획적인 대학살이었습니다. 영국에서조차 같은 백인인 보어인들의 학살에 분노하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1902년 5월 마침내 보어인들은 항복하고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영국은 1차, 2차에 걸친 이 전쟁에서 국력을 집중하여 승리하긴 했지만, 강제수용소와 초토화작전, 보어인과 흑인 대학살로 국제적으로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20세기 초의 보어전쟁으로 영국은 국제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상실했게 되었습니다. 아일랜드에 못지않은 보어인들의 저항에 1910년에는 남아프리카 지역을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출범시켜 내정을 위임했습니다. 이 전쟁에 영국군으로 억지로 끌려와 전사한 아일랜드 병사들이 많은 것이 한편 참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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