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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관심 감사드립니다.
1화 글 첫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글의 목적이 제 유가 예측을 설명드리고 여러분과 토의하기 위한것임을 알려드리며,
그래서 비난보다는 의견개진을 부탁드립니다.
(틀렸을 경우 책임회피를 위함입니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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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에서 설명드린 부분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펙의 태동과 오일쇼크, 그리고 그에 대한 석유수입국들의 대응 및 유가의 경향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화에서는, 현재의 유가 예측에 대한 부분을 잠시 접어두고
오펙의 결성부터 유가 폭락 이전의 시점까지를 다루고자 합니다.
오펙(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석유 수출국 기구)은 1960년 9월 이라크에서 결성됩니다.
하지만, 결성 논의는 비밀리에 훨씬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석유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 떼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전쟁’ 입니다. (제가 밀덕이 된 이유ㄷㄷㄷ)
1949년, 이란과 베네주엘라 관계자들은 비밀리에 석유수출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의 설립에 대해 논의 했습니다.(추후 사우디,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대화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근본적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 1차 중동전쟁(1948-1949)입니다.
영국이 떠나버린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성역을 지키겠다며 독립을 선언하였고,
거의 모든 중동국가와 이집트(아랍연맹)가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삽질 크리로 패배한 이 전쟁이 끝난 후
아랍연맹 사이에 민족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재개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죠.
그 와중에도 사우디, 이라크, 이란 등지의 유전지대에서는 다국적 석유기업이 헐값에 석유를 빼먹고 있었습니다.
이 다국적 기업들을 세븐 시스터즈(7 sisters)라고 부릅니다.
(저 세븐시스터즈 중 5개가 1개기업(스탠더드 오일)이 분할되서 나온 형제들이라는건 함정)
지금은 국영석유기업들에 대응하기 위해서 대형화를 통해 BP, 엑슨모빌, 쉐브론, 쉘의 4개 회사로 합병되었으니 격세지감이죠?
세븐 시스터즈 중 5개 회사는 미국, BP는 영국, 쉘은 네덜란드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 들이 중동지역 석유를 싹쓸이 해가면서 가격 후려치기는 물론이고 담합까지 해서 정부를 상대로 베팅까지 했죠.
정작 자기 땅 밑에 묻혀있는 석유인데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의 수장이었던 나세르는 자기 나라 석유를 헐값에 들여가려는 영국에 빅엿을 날리고
반프랑스 게릴라들에게 지원금을 날리는가 하면
범 아랍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아랍국가의 연합을 촉구합니다.
빡친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일으킨 것이 6일전쟁(6일동안 싸워서 이스라엘한테 쳐발린) 2차 중동전쟁(1956)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아랍국가들이 영국을 위시로 한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여 자신들의 성역을 더럽히며, 자기 영토에서 석유를 헐값에 빼먹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그후, 결국 사건이 터집니다.
시작은 다국적 기업입니다.
1959년, 다국적 기업들은 베네주엘라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가격을 배럴당 25센트, 이란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가격을 배럴당 18센트 낮추어 지급하겠다고 “통보” 했습니다.
(1959년 평균 유가가 2.08불인데 무려 10%를 후려쳐버리는 위엄 ㄷㄷㄷ)
중동국가 입장에서는… 엄청 빡치는 상황이죠…지가 뭔데 ㅡ,.ㅡ;;;
결국 카이로에서Oil Consultation Committee를 개최한 후, 젠틀맨 협의를 이끌어냅니다.
그 이후 다국적 기업은, 원유가격 변동 계획을 산유국에 제출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1960년, 결국 오펙이 창설됩니다.
오펙의 목표는 산유국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가 다들 아는 오일머니 국가들은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비 오펙 국가라고 해봐야 미국 캐나다 러시아 정도고요.
(사실 러시아는 예전에 오펙 가입하라는 권유는 받았는데 거절했다능~)
오펙이 생기게 된 원인은 위와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펙이 꾸민 어마어마한 쇼킹한 오일쇼크에 대해 한번 살펴보기로 하죠
제 4차 중동전쟁 후, 이젠 중동에게도 무기가 생겼습니다.
‘석유’ 를 국영화하는데 성공했거든요
(사실 100% 국영화는 좀 더 지난 후입니다만, 제 4차 중동전쟁 전후를 기점으로 자국 내 국영기업을 세우거나, 기존 기업 지분을 인수하면서 점차 지배권을 확립해 나갑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 미국 등 국가에게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립니다.
이와중에 백미는 “미국 하는 거 봐서 수출 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그 전에 일단 감산할거야 미국 너 똑바로해” 라고 팔짱끼고 삐져있는 오펙앞에서
이스라엘에 22억 달러를 지원하자고 의회가서 성토하던 닉슨 대통령 ㅡ,.ㅡ;;;
결국 엠바고가 걸리고, 대미 석유수출은 봉to the쇄 됩니다.
그리고 유가는 3불에서 12불로 네 배가 되어버립니다 (흠좀무)
자동차에서 기름을 빼가는 도둑에게 경고하는 팻말을 들고 있는 아이와 총을 들고 계신 천조국 성님(출처 : 위키피디아)
그리고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오펙의 비중은 높아져만 가고,
더불어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수입국들은 석유비축 시설을 건설하거나,
(이시기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비축시설이 건설됩니다)
주유소를 늘려 유사시의 오일가격 급등을 대비하고자 했죠.
그 뿐만 아니라, 석탄, 천연가스를 화력발전 원료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에너지 구조 다변화를 꾀했으며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국가적 정책을 수립하였고,
미국에서는 DOE(Department of Energy)가 출범(1977), 자국에 매장된 셰일가스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 개발 연구소, Gas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합니다(1980).
(무려 30년 뒤를 내다보신 천조국의 위엄 ㄷㄷㄷ)
GRI 설립 30년 후의 결과…(물론 2015년부터는 예측이 어긋나기 시작하는건 함정)
(출처: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Annual Energy Outlook”)
그 결과로,
80년대 저유가 시대가 오게 됩니다.
1화에서 말씀드린것과 같이, 유가를 상승시키려는 오펙(이라 쓰고 사우디라 읽는)의 시도는 보기좋게 어긋나 버렸으며
유가는 더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더 자세히 보도록 하죠…
현재 상황과 비교해서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놀랍도록 들어맞습니다.
시작은 미국입니다.
지미 카터와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내 유전개발 시의 규제를 풀어버리고, 세금 감면을 실시합니다.
또한, 그때까지 법률로 규정했던 유가에 대한 정부 개입 중단을 선언해버립니다.
철저히 시장 논리로 유가를 결정한다는 방침을 세웟죠.(레이건 답네)
그 결과,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1977년 석유 소비량 중 46%를 수입했지만, 1982년엔 23% 만 수입하게 됩니다.
또한, 고유가 탓에 늘어났던 소련의 원유 생산량이 80년, 전세계 1위를 먹게 됩니다. ㄷㄷㄷ
이와 함께, 앞서 설명드린 세계 각국의 에너지 효율 향상, 석유에 대한 의존도 하락과 맞물리면서
유가가 곤두박질 칩니다.
오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유가 방어를 위해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석유 생산량을 50%나 감산해 버립니다.
하지만, 비 오펙 국가(미국, 소련)의 생산량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져서
별 효과 없이…
세계 시장에서 오펙의 점유율은 70년대 50% 남짓에서, 85년 30%까지 줄어버립니다.
1980년대 비 오펙 국가의 생산량 증대에 의한 유가 급락, 오펙의 위기 에 대하여 보셨습니다.
사우디의 대응을 제외하면 지금과 놀랍도록 흡사하죠?
데저트 스톰 작전을 수행중인 천조국 전투기들(출처: 위키피디아)
또 한가지 다른점은,
80년대에는 반항아들이 있었습니다.
카다피의 리비아라거나, 후세인의 이라크라거나
특히 후세인이 걸프전을 일으킨 주 이유는
저유가를 타파하기 위해 감산을 주장했지만, 쿠웨이트가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입니다.
쿠웨이트-이라크 경계에 있던 루마일라 필드에서 쿠웨이트가 감산 없이 생산을 지속하자
빡쳐서…(는 물론 쿠웨이트 먹어버리고 싶어서 안달 났었죠 수십년간)
쿠웨이트를 공격한 겁니다.
뭐 이것도 결과는… 천조국 성님의 데저트 스톰 작전으로 망했지만요.
참고로 걸프 전 당시의 유가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는데요,
여타 오펙 국가의 증산과 세계 각국이 이때를 위해 비축해뒀던 원유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현재는 반항아가 없습니다.
후세인도, 카다피도, 차베스도 모두 없는 지금
사우디의 말을 거역할 사람은 오펙에 없다는 거…
(사실 그당시 반항한 국가들에 대해 오펙(이라고 쓰고 사우디)이 추후 불이익을 줬습니다.)
80년대의 교훈 때문에
사우디를 필두로 한 오펙은 현재
‘점유율’ 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덤핑공세를 통한 비 오펙 죽이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후 유가는 나름 안정적으로 조금씩 올라가다가 또 한번 분수령을 맞습니다.
1997년 11월,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오펙 생산량 조정 회의를 하게 됩니다.
뭐 세계경제도 문제 없어보이고 소비도 꾸준하고
조금 증산하자. 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한달 후….
아시아 금융위기가 생깁니다(그 유명한 IMF)
오펙 국가들은 그야말로 망……
그로부터 석유관련 업계에서는
바보 같은 예측이나 멍청한 결정을 두고 Jakarta mistak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ㄷㄷㄷㄷㄷ
이번에는 유가 폭등의 시대를 보겠습니다.
2004년부터 유가가 오르기 시작합니다.
흔히 꼽는 이유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의한 소비 증대 인데요
이것과 더불어 몇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원유는 항상 과잉공급입니다.
원유는 땅속에 존재하며, 생산자가 생산하면 그만인 이미 제품화 되어 있는 녀석입니다.
더 뽑고 싶으면 더 뽑아먹을 수 있죠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미 석유 부존이 확인되어 있는 광구라 하더라도, 생산정 시추, 설비 건설 등에 오랜시간이 걸리기에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아봐야 1년 길면 5년까지도 걸립니다.
그것이 2004-2014년까지의 고유가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입니다.
80-90년대까지의 저유가 시대 동안,
석유 업계는 투자에 소홀했습니다.
굳이 단가가 비싼 광구를 개발하는 등 무리할 필요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러다보니 2000년대 몇가지의 사건이 뒤엉키면서 유가는 100불을 넘어 한때 140불을 넘어 150불을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 원인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번째는 미국의 태풍 카트리나
카트리나는 미국의 주요 정유시설이 밀집해 있는
텍사스, 루지애나를 습격해서 초토화를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 미국의 정유 및 생산시설이 30% 아작 나버립니다.
게다가 발전과 전력 수송에 문제가 생겨서, 그나마 생산되던 석유마저 수송을 할 수 없는
국가 마비 사태가 옵니다. ㄷㄷㄷ
이때가 사상 최초로 한국의 비축유를 미국에 수출(!!!) 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태평양 저 멀리에 있는 석유도 별로 안나는(동해에 가스필드 하나 있지만) 나라에서 비축유를 얻어 쓸 정도였으니… 미국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아시겠죠?
미국 내 생산으로 국내 수요를 커버 못하니 미국의 원유 수입이 급증하였습니다.
미국 내 석유 소비 중 수입 석유 비율
(출처:Bloomberg)
두번째 이유는, 나이지리아 입니다.
나이지리아는 니제르 델타 지역이 가장 큰 석유매장지 입니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원유량 3위가 바로 나이지리아 산입니다.
(대서양만 건너면 되니까…)
근데 아시는 것처럼 나이지리아는 치안이 안좋거든요…
석유만 골라서 훔치는 갱단(자신들은 결백한 민간인이라 주장하는)도 여럿 존재합니다.
그 중 한 갱단이 다른 갱단을 흡수통일(!) 하더니
그전까지는 송유관을 부수고 석유를 빼먹었다면
이제는 생산시설을 점거하기 시작한거죠 ㄷㄷㄷ
그 때문에 수많은 직원들이 본국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나이지리아 석유 생산이 70% 줄었습니다.
(갱단치고는 통크네)
미국의 원유 공급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세번째는, 이라크 전입니다.
그동안 세계 석유에 큰 축(과 악의축도) 담당하던 이라크가
미국의 침공을 받게 되고,
정작 첫번째 목표였던 석유시설들을 점령하고 살펴보니
장비가 노후화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생산량을 기존에 계획했던 일산 6백만 배럴까지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와중에 치안까지 개판이니…..
그렇게 또 하나의 원유 공급책이 사라졌습니다.
네번째는, 앞서 말씀드린 중국입니다.
그 외에도, 2002년, 차베스에 반발한 베네주엘라의 석유업계 노동자들의 총파업 등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와중에, 그 전까지의 길었던 저유가 시대에 걸맞춰(?) 신규 광구 개발이 지지부진했던 것이 크리티컬로 작용했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브렌트 유 가격
(출처 : 위키피디아)
아시아 외환위기가 회복되는 1999년부터 서서히 오르더니
2006년에는 80불 근처까지, 2008년엔 140불을 뚫어버립니다.
그 후에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여파로 인한 2008년 잠시 40불 대를 유지했던 것을 제외하곤 금방 회복해서 100불대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유가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는 상당히 많습니다.
(하다못해 갱단들 까지 유가에 영향을 미치니 원;;;)
하지만, 이러한 고유가 상황에서야 비로소 셰일가스를 위한 본격적인 시추 및 개발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