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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무용지물이 아니라 백해무익한 이유2-일자철학의 폐해
게시물ID : phil_173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3
조회수 : 83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21/03/22 13: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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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일자(一者)의 철학, 본질진리의 철학, 영원한 피안의 철학이 주요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일자에 대한 철학은 나무의 이미지로 사유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숨겨진 채로 생명을 지켜주는 본질 혹은 형상이며 나뭇가지는 뿌리로 말미암아 생명을 갖게 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보여지는 현상이라는 것이죠. 플라톤 이후 이데아에 대한 갈구, 진리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에 대한 탐구가 서양철학의 주류였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기독교에서는 신으로, 칸트에게서는 물자체로, 헤겔에게는 절대정신, 하이데거에게는 존재, 필머에게는 왕으로 변주되어 연주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위에 말한 본질은 사건 개별에 대한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기술한 본질은 영원히 변치 않는, 우리가 감각할 수 없는 세상의 원리를 말합니다. 이데아 혹은 물자체 같은 것이죠. 예를 들어 '조국사태의 본질은 검찰내 기득권 세력과 검찰 개혁을 하려던 세력간의 알력싸움이다'라는 말에 나온 본질은 개별 사건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지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죠.

 
본질에 대한 탐구, 본질을 향하는 열정은 세상이 변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세상에는 본질적인 부분(뿌리)이 있어 변하는 것이 아니고, 감각되는 현상이 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진리는 존재하고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할 뿐.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가치없고, 본질과 우리의 인식기관의 상호작용으로 단지 보여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본질주의자는 보수적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기 때문에 그 본질로 사용되고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경은 시력을 보조해주는 본질이 있는 것이라 악세사리로, 미용적인 용도로 써서는 안되며, 램프는 조명의 목적으로만 써야지 인테리어 소품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러한 관점이 종교를 만나면 더 큰 시너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생'은 창조주를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창조주의 뜻을 알아서 창조주의 뜻과 벗어난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창조주에게 심판을 받는 날 떳떳하게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본질이라는 것은 사후적인 의미부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의자의 본질이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것이어서 의자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의자는 사람이 앉기 좋기 때문에 앉는 것은 아닐까요? 물컵은 애초에 물을 담는 본질을 갖고 있다기 보다는 물컵이 물을 담기 편하기 때문에 우리가 물컵의 본질은 물을 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이러해"하고 나는 되풀이해서 중얼거린다. 만일 내가 나의 시선을 이 사실에다 그저 아주 명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철학적탐구에서 말합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사전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후적으로 만든 의미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관절염 약으로 생산, 유통되던 클로로킨은 더 이상 관절염 약으로 잘 쓰이지 않습니다. 4일열원충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고 밝혀져 주로 말라리아 치료에 쓰이죠. 그러니까 과거에 클로로킨은 관절염치료제라는 본질이 있어서 관절염에 쓰인 것이 아니라 관절염에도 효과가 있던 약이었던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말라리아 치료제라는 본질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물론 본질의 개념을 영원히 폐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 개별사물에 대한 본질처럼, 본질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가 너무 예뻐서 산 의자는 너무 약해서 사람이 앉을 수는 없지만 인테리어에 좋을 것 같아서 산것이라 나에게 저 의자의 본질은 인테리어이다라고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기득권과 검찰에 불만이 있는 사람에게는 조국 사태는 기득권과 개혁세력간의 알력싸움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고, 경제 정의 실현에 촛점을 맞춘 사람이거나 입시생을 두고 있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다른 본질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급하게 일반화를 해보면 본질의 절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거부한 것이 아닌 변화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본질주의자는 보수주의자 이지만 보수주의자는 본질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보수주의 자체가 본질주의자 처럼 근본주의적인 면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그 자체로 부정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쓸데 없는 논란이 생길까봐 적어봤습니다.)
 
지금 세상에 본질주의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또 쉽습니다. 지금 본질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나 사상가, 정치가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종교의 영역에는 너무나 많죠.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본질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본질을 믿고, 탐구하는 것 자체는 비난을 받을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본질을 염원하면 필연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배타성이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혐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밑에 첨부한 사진에 보면(누군가를 저격하는 글은 아니므로 아이디는 지웠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 동성애에 대한 혐오(?), 외국인에 대한 혐오(?, ? 표시를 한 것은 제가 보기에 혐오성 발언이지만 당사자라든지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아닐 가능성도 있어보여서 표시하였습니다.)와 절대적인 신에 대한 애정이 같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지만 배타적인 종교를 갖게 되어 세상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며 세상을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본질주의자라고 하기 어렵더라도 일자에 대한 철학은 인간들 간의 자유로운 연대보다는 배타성을 강조합니다. 국가에 가장 큰 권위를 두는 애국자에게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혹은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적이 될 수 있고, 민족주의자에게 다른 민족은 적으로, 종교인에게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죄악으로, 래디컬한 페미니스트, 마초이스트에게 타 성별은 탄압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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