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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그냥 흔하게 볼 수 있는 오락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보여지는 철학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한가지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코 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혹은 유명한 고승의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자비가 담겨 있지 않다면 큰 의미를 갖는 가르침이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일체개고를 깨달아 우리의 인생이 고통으로 점철되어져 있다는 가르침은 결국 타자의 고통을 바라보게하여 역지사자의 자비를 배우게 됩니다. 제법무아의 가르침도 영원한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현실의 타자에 대한 애정으로 자비를 가르치죠. 제행무상 역시 매 순간 변하는 세상 만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통해 자비를 보여줍니다. 3법인(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 혹은 4법인(일체개고,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 중 열반적정도 결국 자비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열반은 불어 꺼트리다라는 뜻으로 사망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깨달음, 해탈을 뜻합니다. 번뇌가 꺼지는 것을 말하죠. 열반은 그러므로 성불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불은 오랜기간 거울의 이미지로 생각되어져 왔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거울의 이미지를 깨려고 노력한 고승들도 많았죠. 가장 재밌고 유명한 일화가 5조 홍인의 제자 신수와 혜능의 이야기 입니다.
선불교 초조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선불교의 최고 스승자리에 올랐던 5조 홍인이 제 6조를 뽑으려고 합니다. 홍인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공부를 많이하고 너무나 영민했던 신수라는 제자가 6조가 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홍인은 6조가 되고 싶은 제자는 담벼락에 자신의 깨달음을 써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최고의 수제자 신수는 '이 몸이 바로 보리수/마음은 맑은 거울/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먼지가 앉지 않도록' 이라고 우리의 마음을 청동거울에 비유해 멋지게 표현합니다. 낮동안 나무하러 갔던 혜능은 옆에 있는 스님에게 신수의 글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혜능은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으며, 불문에 들어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수의 시를 듣고 옆에 스님에게 자신의 글도 써달라고 합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맑은 거울에는 틀이 없다/본래 아무것도 없는데/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 글도 모르는 혜능이 홍인의 수제자에게 디스를 합니다. 하지만 밤중에 두 시를 본 홍인이 혜능을 찾아와서 몰래 6조의 상징인 가사와 발우를 내어주고 그 길로 도망가게 합니다. 글도 모르고 아무런 파벌이 없는 혜능이 6조가 되었다는 것을 신수와 그 사제들이 알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까요.
이 이야기에서 신수는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 불교의 한켠에 흐르는 거울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이미지대로 사유를 합니다. 하지만 혜능은 마음이 청동거울이라는 사유를 거부하죠. 청동거울은 수시로 닦아주지 않으면 먼지가 끼고 녹슬어서 세상을 비추지 못합니다. 그 거울을 닦는 만큼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해야 하는 것이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면 결국 편집증적으로 내적수양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울 닦는 것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죠. 문제는 열심히 닦아서 깨끗한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하더라도 타자와의 만남에서 생길 수 밖에 없는 번뇌 때문에 결국 타자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내 몸의 때를 모두 제거하면 도움이 필요한 더러운 사람을 어루만질 수 없는 것이죠. 또 내 몸에 때가 낄테니까요. 이러한 깨달음이 어떻게 성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타자에 대한 관심, 애정, 공감이 없는 편집증적인 자기 학대만 남은 것을 자비와 보시를 최고로 꼽는 불교에서 깨달음이라고 하기 어렵겠죠.
오랜시간 이어오던 거울의 이미지와 거울의 이미지를 깨려는 싸움은 불교의 변방이었던 신라에서 해결이 됩니다. 원효는 마음을 명경이 아닌 지수의 이미지로 다시 사유합니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이라는 경전에 주목하여 주석서 대승기신로소를 쓰면서 마음을 고요한 물에 비유합니다. 연못이나 저수지 혹은 물웅덩이에 물을 채우면 흙탕물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요해지면 다시 맑아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불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나뭇잎이 떨어지거나 작은 바람에도 다시 물은 흔들립니다. 하지만 이내 다시 고요해 집니다. 열반에 이른 마음은 고요하여 너무나 예민하게 타자에 반응하게 됩니다. 타자의 슬픔에 같이 슬퍼하고 타인의 괴로움에 같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외부적인 번뇌에 반응을 하는 것이지 내적인 갈등으로 어지럽혀지는 것은 아니죠. 작은 바람에도 같이 반응해주는 예민한 마음. 이것이 원효가 바라본 성불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에 이르지만 그것은 찰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열반에 이르러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성불한 이후에 미련없이 속세로 들어갑니다. 깨끗해진 손으로는 아무도 잡아줄 수가 없습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자리는 자기가 이로운 상태, 이타는 자리를 이루고난 뒤 남이 성불하는 것을 도와주는 보살행을 말합니다. 백척 높이의 대나무 끝에 올라가서 세상을 봤으면 다시 내려와서 그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최고 경지 보살을 말하는 것이겠죠. 더구나 청동거울은 부잣집에서 쓰던 귀한 물건이었다면 고요한 고인물 지수는 아무나 쉽게 접근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 나온 항아리 씬 처럼 물속으로 항아리를 던지면 항아리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가 일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항아리를 품은 채 다시 고요해질 겁니다. 타자와의 소통과 마주침 없는 성불은 그저 고립된 자아를 표현할 뿐입니다.
승리호 승무원 네명은 모두 나름의 고통과 고통의 기억을 갖고 살아갑니다. 세명의 고통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김태호의 고통은 자세하게 나옵니다. 자신이 죽였던 자의 딸을 자식으로 받아들인 후 애지중지 키우다 길거리에서 어이없게 잃은 사건. 그 사건으로 순이의 사체라도 찾으려고 3년을 돈에만 매몰되어 살아갑니다. 그 사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순이는 죽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순이를 잊지 못하는 김태호의 집착일 뿐입니다. 그 집착이 김태호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꽃님이라는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를 만나도 그 아이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오로지 모든 관심은 순이의 사체를 찾는데만 집중되어 있죠. 뿐만 아니라 꽃님이가 로봇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김태호는 꽃님이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선장의 말에 놀랍니다. 특별한 논증이 필요가 없죠. 먹고 똥을 싸는데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꽃님이가 로봇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조차 생각을 못한겁니다. 순이라는 집착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에 비하여 꽃님이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아버지와도 이별하게 되었지만 승리호 승무원들을 잘 관찰하고 그들에 대한 그림도 그리고 마음을 열고 그들을 대합니다. 결국 여러 과정을 거쳐 마음의 짐을 덜어낸 승리호 승무원들은 자신의 목숨과 30억명의 인류의 생명을 맞바꾸려고 하게 됩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사람. 이것이 자비고 성불이 아니겠습니까? 승리호 승무원들은 꽃님이라는 보살을 만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본래면목을 보면서 성불하게 되고 보살행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승리호 승무원들이 수소폭탄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입니다. 사실 참 의아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딥임팩트에서도 오리온호 승무원은 모두 죽었으며, 아마겟돈에서도 브루스 윌리스는 죽었고, 라이언일병 구하기에서도 톰 행크스는 죽었습니다. 마지막 승리호 승무원들의 희생이 인류애로 승화되는 그 지점을 한번 더 꼬아서 모두 생존시킵니다. 네명 모두 성불한 부처가 되었는데 수소폭탄 쯤에 굴복할 수 있나요? 어찌보면 당연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두 죽이는 것이 당연하고 쉬운 결말이었겠지만 굳이 위험을 무릎쓰고 다 살린 이유가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한국 고전문학의 형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면도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이 전개되다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소동이 한바탕 일어난 후 권선징악의 결과가 도출됩니다. 춘향전에서도 한바탕 암행어사 출두 후 사건이 해결되고, 흥부전에서도 박에서 도깨비들이 한바탕 놀부를 징벌합니다. 영화 라이터를 켜라, 주유소 습격사건 등에서 볼 수 있는 전개 양상이죠. 승리호에서도 일을 해도 빚만 쌓이는 현실과 인류의 대학살 앞에서 민중이 일어나 권선징악의 결말을 갖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김태호의 인생은 하나의 철학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UTS의 기동대로 UTS의 시민이 아닌자를 엄청나게 도륙하는 설리반의 부하로서 남의 명령에 따르는 낙타와 같은 삶을 살다가, 직업을 잃고 순이를 잃고 세상에 저항하는 사자의 삶을 살다가, 꽃님이를 만나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의 삶을 살게되는. 지겹게도 나오는 니체의 초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무리 일을해도 돈을 벌기는 커녕 더 빚만 쌓이는 세상에서 꽃님이를 통해 초인이 되고, 나머지 승리호 승무원들도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당당한 주체로 승리하게 되는 영화. 이 영화에 나온 우주선이름이 승리호인 이유는 승리호가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기 때문에 승리호가 된것일 것입니다.
물론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저에게는 최근에 본 한국영화 중에 단연 최고의 영화였고,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혹은 반단계라도 더 끌어올리는 영화가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