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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역귀를 토벌해서 마을을 지켜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비대장님은 저희 마을의 은인이자 영웅으로 대대손손 칭송받으실 겁니다.”
성철의 칭찬에 기령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늘상 겸손하고 정중한 성철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깊이가 달랐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전 그저 마을을 위해 당연한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성철은 마을 외곽에 있는 호숫가 정자로 기령을 안내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여쭤볼게 있습니다. 역귀들이 마을로 들어오려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래전 역병이 돌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역귀들이 난폭해진 때, 그리고 오늘 마지막 역귀들까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마을로 들이닥쳤습니다. 그 이유가 짐작 되십니까?”
기령은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역귀들은 하나같이 마을로 들어서려했다. 주문이 폭주하기 전의 역귀들부터 오늘의 두억시니까지. 그들이 필사적으로 마을을 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경비대장님이야 모든걸 다 알고 계실테니 제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귀들은 본능적으로 주술을 건 이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주술자를 공격하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저희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겁니다. 주문이 폭주하니 그 살의는 더 커졌겠지요.”
그 말에 기령은 놀라고 말았다. 이장의 아들인 성철도 대략 알고 있을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 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성철은 계속 이야기 했다.
“그러면 오늘 남은 녀석들이 모두 악착같이 달려들었던 이유도 설명이 되지요. 저희 아버지께서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낀 겁니다. 오늘밤이 마지막 기회였으니 그리 저돌적으로 공격을 해온 것이겠지요. 만약 경비대장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아버지는 그리 편히 떠나지 못하셨을 겁니다. 끔찍한 일이지요.”
기령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해하시겠지요? 원한은 결국 해가 되어 돌아옵니다. 아버지께선 무고한 사람들을 역귀로 만든 크나큰 죄를 지으셨고 그로인해 마을에 큰 화가 닥쳤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도가 좋았다 해도 죄는 죄니까요.”
성철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이어서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우리 마을에 해가 될만한 것들은 전부 배제시켜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저는 힘이 없어 마을사람들을 역귀로 만드신 아버지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폭주하는 역귀들을 없앤다며 무고한 아이들을 살육한 경비대장님도 막을 수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을 책임지게 된 지금, 대장님이 지은 모든 악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 마땅합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느새 정자 주변으론 무장한 사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무슨소릴 하시는 겁니까. 저와 이장님은 마을을 위해서... 아니 그보다 이장님께선 분명 제게 마을을 부탁하신다 하셨습니다. 유서에 분명 써있을 겁니다. 제가 역귀를 해치운다면...”
“아니요. 유서 같은건 존재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제게 마을을 맡기셨고 과거의 죄를 속죄하고 싶다고 하셧습니다. 또한 자신과 같이 죄지은 자들을 엄벌 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니 경비대장님도 책임을 져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기령은 가만히 성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성철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미소를 본 기령은 새삼 주변에서 다가오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성철의 부하임이 틀림없는 그들의 왼쪽 팔에는 녹색의 완장이 채워져있었다. 예전에 성철이 들고 있던 그 천이었다. 그제야 기령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장님처럼 완벽을 추구하시는 분이 유서를 남기지 않으셨을리 없습니다. 누군가 빼돌린게 분명하지요. 그리고 한가지 더. 어쩌면 누군가가 이장님의 죽음에 관여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역시 지울 수 없습니다.”
성철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유서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스스로의 죄를 안고 돌아가셨지요. 그게 전부입니다. 지금 마을의 책임자는 저고. 대장님은 그저 범죄자입니다.”
기령은 손을 움직여 칼을 잡으려 했지만 무장은 이곳에 오기전에 전부 벗어버린 후였기에 잡히는게 없었다. 기령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네놈이 자리에 눈이 멀어 이장님을 죽이고 거짓말을....진작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성철은 잠시 기령을 바라보다가 기령에게 한걸음 다가와 작게 말했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건 오직 저뿐입니다.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역귀놈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에게 이장직을 물려준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셨지요. 잘못된 판단입니다.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할 줄 아는거라곤 싸움뿐인 무식쟁이가 할일은 더러운 역귀놈들을 막는일 뿐입니다. 저 역시 역귀들이 계속 존재 했다면 당신에게 이리 예의 없이 굴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을이 안전해진 지금, 당신은 그저 죄인입니다. 아시겠지요? 평화로운 우리 마을에 남은 괴물이라곤 당신뿐인 겁니다. 물론 토벌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적어도 제가 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경비대장님과 토벌대는 잔학무도한 역귀들을 물리치고 장렬히 전사한 마을의 영웅으로 대대손손 칭송 받으실 겁니다.”
기령은 할말을 잃었다. 결국 이것이 끝이란 말인가? 마을을 위해 온몸을 던져 애쓰다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것.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론 도망칠수도 없다.
“전부 끌고와.”
성철의 명령에 곧 손이 포박당한 토벌대들이 끌려왔다. 모두 무예가 출중했지만 역귀와의 전투 때문에 성철의 부하들에게 쉽게 제압당한 듯 했다. 토벌대 맨 앞에는 부상을 입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대장이 쓰러진 채 숨을 헐떡였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듯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다.
“모두가 대장님을 기억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토벌대와 함께 전설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마을은 저와 제 휘하의 새로운 경비대가 책임질 겁니다. 아, 대장님 방에서 얻은 이 녀석은 제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봐와서 이미 내용을 다 외우다시피 했지만 잘 보관해야 하니까요.”
기령은 성철이 꺼내든 주술책을 보고 번뜩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조심스레 품안을 더듬어본 기령은 미소를 지으며 성철에게 말했다.
“머리만 좋은 샌님인줄 알았더니 호로새끼가 따로 없구만, 이장님 말씀이 맞았어. 넌 그릇이 안되는 놈이야.”
기령을 붙잡기 위해 몇 명의 사내들이 다가오자 기령의 손이 천천히 품안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너. 그 책 다 외웠다고 했지? 그런데 아마 다시 봐야할거야. 내가 추가한 부분이 있거든.”
성철은 의아해 하며 책을 펼치곤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의 맨 뒷장에 기령이 한자한자 써내려간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역귀들 잡다가 알아낸게 하나 있지. 중요한 내용이라 내가 적어 넣었어. 아마 이장님도 몰랐던거 같은데 말이야. 토벌중에 대원 한놈이 흥분해서 역귀 심장을 씹어먹는 정신나간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알게됐지.”
기령은 품안에서 천에 쌓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성철은 당황한 목소리로 글자를 읽었다.
“역귀를 만드는 쉬운 방법?”
“아니 역귀가 되는 쉬운 방법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 말한 기령은 천에 쌓여있던 살덩이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역귀 심장이다. 이걸 씹어 먹으면 어떻게 되는 지 잘 봐.”
성철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기령은 성철의 멱살을 잡아채고는 입에 있던 역귀의 심장을 씹어 삼켰다.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아? 좋아. 네놈들 말대로 괴물이 돼주지. 괴물이 돼서 널 조각조각 내주마.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마음껏 날뛰어 볼 테니 어디 한번 막아봐.”
들고 있던 고기 덩어리를 토벌대 쪽으로 던진 기령은 곧 몸이 갈라지며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을 느끼겠지만 기령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상황이 바뀌자 기령을 성철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작 몇명만으로는 기령의 힘을 감당 할 수 없었다.
“전부 달라붙어!! 이놈을 죽여!!”
성철이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소리치자 토벌대를 제압하고 있던 모든 사내들이 성철에게 뛰어갔다. 감시자가 없어진 토벌대들 앞에는 기령이 집어던진 역귀의 심장이 놓여있었다. 부대장은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토벌대에게 소리쳤다.
“대장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 마을에서 배신당해 목이 달아갈 상황에서 대장님이 목숨을 버려 우리에게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 주셨다. 모두 도망쳐라!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난 대장님을 도와 저 간악한 무리들을 저승으로 보내겠다!”
부대장은 재빨리 몸을 날려 떨어진 역귀의 심장을 베어 물었다. 부대장의 고통스러운 비명에도 토벌대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부대장에게 다가가 떨어진 역귀 심장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내들의 도움으로 기령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성철은 멀지 않은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성철의 시선이 닿은 곳엔 포박되어있던 토벌대 전원이 역귀로 변하며 힘으로 밧줄을 끊어내고 있었다.
“막아! 저녀석들이 역귀로 변하기 전에 죽여!”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역귀로 변한 기령을 붙잡아 두는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막아! 놈들을 막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역귀들을 보며 성철은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기령에 의해 조각나는 사내들의 비명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층 더 기괴한 모습이 된 기령이 성철의 몸을 잡아채서는 아주 천천히 성철의 몸을 뜯어내었다. 어느새 완벽하게 역귀로 변한 기령과 토벌대들을 막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마을에는 더 이상 역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존재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