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이 일년을 넘어가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졌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아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자영업자는 코로나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으며, 자영업자의 고통과 함께 실직한 분들도 너무나도 잔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죠. 보들리야르의 말처럼 자본주의의 본질은 생산이 아닌 소비이기에 소비가 위축된 현 상황에서 자영업자와 실직자 만이 아닌 여러 기업들을 비롯한 적지 않은 경제주체들도 힘듦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겠죠. 저 역시도 자영업자의 한 사람으로써 나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병원이라는 제한업종이 아닌 자영업이라 제한업종에 종사하는 분들만큼 어렵지는 않겠죠.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든 타인을 본다고 그것이 무슨 위안이 되겠습니까. 이럴때 위안을 주는 철학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세네카라고 하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에 관하여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에서 소개된 세네카의 철학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 큰 것 같습니다.
세네카는 네로황제의 스승으로 로마정계의 정치적 알력 싸움으로 스캔들 누명을 쓰고 유배되는 바닥을 경험하고, 황제의 스승으로 정계에서 정점을 찍다가 다시 그 제자인 황제로부터 죽임을 당한 철학자 입니다. 세네카의 철학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순응하라고 말합니다. 인간이란 마차에 매달린 개와 같아서 마차라고 하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해도 인간이 벗어날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도 개목줄만큼의 자유가 있기에 그 자유를 이용하여 최대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꾸려갈 수는 있습니다. 마차의 방향에 역행하려고 하면 마차에 끌려갈 뿐이고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자신의 목줄 길이만큼의 자유는 확보가 되는 것이죠.
언듯 보면 운명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인간상을 상정한다고 보겠지만, 세네카가 살았던 시대의 로마를 생각한다면 다분히 섣부른 판단입니다. 세네카가 살았던 로마는 도시에 물이 부족하면 수십킬로미터 밖의 수원지에서 수도교를 만들어 물을 끌어오고, 도로를 포장했으며, 도시마다 콜로세움을 만들던 인간의 의지와 능력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했겠죠. 세네카는 그 와중에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자연재해를 여러번 목격하게 됩니다. 그 시기에 지진도 목격하고 화산폭발로 도시 하나가 온전히 쓸려나가는 상황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운명의 여신 앞에 서있는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느끼게 된 것이죠. 이카루스처럼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었지만 날 수 있는 한계는 명확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네카는 수동적인 삶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다 함(방역, 백신)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그 운명을 받아들여 불필요한 번뇌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동양철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긴다. 이 말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도 않으며, 결과로부터의 책임도 면하게 해주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최선을 다 했다면 죽음조차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나 스스로 충실하게 임했다면 그 결과로 죽음을 맞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궁극적인 위안을 주는 말이죠. 그래서 세네카는 자신의 제자로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아무런 동요없이 자살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도망을 치거나 너무 슬퍼서 울지만 세네카는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자신의 철학을 관철합니다.
또한 세네카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지금의 어려움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직시하는 것을 피하지 말고 제대로 두눈뜨고 관찰하라고 합니다. 다소 잔인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막상 지금의 어려움을 명확하게 관찰하면 실제 어려움이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보다 훨씬 별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관찰해 보라고 합니다. 어쨌든 코로나로 인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 발생했지만 건강하다면 긴 인생에 비춰볼 때 다시 재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건강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도 높겠죠. 그 어려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지날 것이고, 지금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한다면 그 결과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을 추상적인 감정으로만 느낀다면 잘못된 행위를 통해 더 어려움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당장 내가 입은 상처를 쳐다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막상 상처를 자세히 보면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할지 알게 되는 것이죠.
코로나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지금, 그 터널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터널은 끝날 것이고 터널이 끝나면 밝은 세상은 다시 돌아 올 것입니다. 터널이 길고 어두울 수록 터널 밖이 더 밝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더 밝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두움이 오래 됐기에 생기는 착각이겠죠. 하지만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남을 것이고, 또 다른 터널이 올 수 있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터널이 끝나고 더 밝은 세상이 오지는 않더라도 사전숙고를 통해 또 다른 터널이 왔을 때는 지금보다는 더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힘은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터널 밖의 일상의 소중함도 알게되겠죠.
밑에 쓴 영화 '윤희에게'에 관한 글을 다시 읽어보다 보니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대사가 머리에 맴돕니다. 과연 눈이 언제쯤 그칠까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