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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토벌대 한명이 휘두른 칼에 가장 작은 역귀 하나가 쓰러졌다. 오랜시간 차분히 싸워 얻은 성과 였다.
“좋아 확실히 처리하고 무기를 정비한다. 그리고 나머지 역귀에 한명씩 합류해서 녀석들을 도륙내!”
처음 한 마리가 힘들 뿐 일단 균형이 무너지면 남은 녀석들 상대는 수월해 진다. 기령은 승리가 머지 않았음을 느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역귀를 상대하던 토벌대 하나가 흥분을 했는지 조금 무리해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역귀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잡다한 상처였지만 몸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부위 한쪽 상처가 깊은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를 본 토벌대는 기운차게 소리쳤다.
“다리! 다리를 공격해! 끝낼 수 있다!”
뒤이어 빈틈없이 이루어진 토벌대의 합공에 역귀는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멀리서 활을 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대들은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하지만 기령은 크게 소리쳤다.
“아직이다. 서두르지 말고 잠시 물러서서 무기를 정비해라!”
하지만 기령의 외침은 경비대의 환호와 역귀의 울부짖음에 가려져 닿지 않았다.
“죽어! 이 괴물 자식!”
마음이 급했던 토벌대 하나가 전력을 다해 쓰러진 역귀 몸위에 올라타고는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서두른 탓에 칼의 상태를 확인 하지 못했다. 역귀의 체액으로 더렵혀진 칼은 역귀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고, 역귀는 누운채로 자신의 몸 위에 올라와 있는 토벌대원을 말 그대로 찢어 버렸다.
“쏴라!! 일어나지 못하게 해!”
기령의 외침에 경비대들이 일제 사격을 했지만 역귀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때 두억시니가 움직였다.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던 두억시니는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는지 저돌적으로 달려 기령이 속한 조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쓰러진 역귀를 막고 있던 남은 토벌대를 순식간에 도륙내기 시작했다. 무기상태가 엉망이었던 그들이 고깃덩어리가 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을 가로막던 토벌대가 사라지자 쓰러져 있던 역귀도 일어나더니 전혀 주저함 없이 다른 토벌대를 노리고 들어갔다. 두억시니가 크게 포효하자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다른 역귀들 역시 더욱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억시니의 움직임 하나로 유리하던 싸움이 순식간에 뒤집어 지고 말았다.
“대장님. 대열이 무너집니다!”
돌진하는 두억시니를 피하다가 바닥에 쓰러졌던 기령은 부대장의 말에 다급히 일어나서는 전황을 살폈다. 남은 역귀는 셋. 부상당한 한 마리는 어찌 어찌 제압할 수 있을 듯 했지만 이미 토벌대 다섯이 죽었고 폭주하는 역귀들 때문에 대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게다가 소극적이던 두억시니가 공격을 시작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 토벌무기가.... 더 이상 공급이 불가능합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장 걱정하던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토벌대 전멸은 물론 마을까지 끝장이었다.
“서둘러 대열을 가다듬어라. 남은 인원끼리 다시 조를 짜서 녀석들을 떨어트려 따로 따로 상대한다. 절대 섣부르게 공격해선 안된다. 시간을 끌어라!”
부대장에게 그렇게 명령을 내린 기령은 보급을 담당하던 두명의 토벌대에게 돌아서 말했다.
“너희 둘. 남은 화살 전부 챙겨서 나를 따라와라.”
보급대원 둘은 서둘러 화살을 챙기러 갔고 기령은 이전에 명령을 내려두었던 경비원을 찾았다. 경비원은 마을에서 어린아이 네명을 데리고 와서는 한쪽 구석에서 대기 하고 있었다.
“큰 금액을 지불하겠다 했지만 아이들을 내어주는 가족은 거의 없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 한명만 간신히 데려왔고 나머진 부모 없이 동냥으로 먹고사는 아이들입니다.”
기령은 아이들을 살폈지만 눈을 보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해져 주저할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그저 철저히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아이들의 다리를 베어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데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기령의 행동에 놀란 경비대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이어 화살을 잔뜩 들고 온 보급대원 둘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화살에 피를 묻혀 역귀 토벌용 화살을 만든다. 그리고 전부 경비원들에게 보급하는거다. 경비대에게 자세한 설명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니 서둘러라. 마을을 지키기 위한 일이다.”
그리곤 화살 한웅큼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이의 다리에 한번에 찔러 넣었다. 화살에 피가 골고루 묻은걸 확인한 기령은 그걸 전부 화살통에 꽂아 넣고는 등에 매고 있던 활을 꺼내어 역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멍하니 있던 보급대원 둘은 화살을 잔뜩 들고 조금은 주저하며 쓰러진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물러서라!”
기령의 외침에 역귀를 상대하던 토벌대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곧 기령이 쏜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역귀의 몸 한가운데 박혔다. 경비대들이 쏜 화살은 수십발을 맞아도 꿈쩍없던 역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령의 화살 단 한발만으로 역귀는 꿈틀대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다시 달라붙어!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길만 막아라. 공격은 내가 맡겠다.”
효과가 있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 토벌대 몇 명이 더 죽었지만 다친 역귀 역시 제압한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역귀는 두 놈.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과 두억시니 뿐이었다. 두억시니는 다른 녀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기령은 서둘러 눈앞에 있는 녀석을 잡고 두억시니를 처리할 생각을 하며 침착하게 활을 쏴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보급대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화살 전달이 끝난 듯 했다.
“전부 뒤로 물러서! 이제부터 경비대가 일제 사격한다.”
기령이 신호하자 외곽에 있던 경비대들이 일제히 활을 쏘기 시작했다. 화살촉 하나하나에 선명한 붉은빛이 돌고 있는 화살들이었다. 엄청난 양은 아니었지만 상처를 입은 역귀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양이었다. 화살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령 앞에 있던 역귀가 쓰러졌다.
“아직 한놈이 남았다! 무기가 남아있는 토벌대는 정렬해라!”
화살비가 끝났음에도 두억시니 만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화살이 큰 타격을 입힌 듯 불안정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령은 방심하지 않고 토벌무기가 남은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 더 이상 무기수급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부대장을 포함한 단 세명만이 효과를 볼 수 있는 칼을 들고 있었다. 이것마저 못쓰게 된다면 더 이상 역귀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 두억시니도 그것을 아는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시간만 끌어대고 있었다. 대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해 지는건 결국 토벌대였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무기가 남은 토벌대원 중심으로 세 개조를 짜서 둘러싼다. 절대 도망 못치게 잘 잡아두고 빠르게 마무리 하겠다.”
기령은 화살통에서 마지막 화살을 꺼내들어 활에 먹이고는 기회를 엿보았다. 이제는 무리해서라도 녀석을 처리해야 한다.
“공격해! 쉴 틈 없이 몰아붙여라! 어떻게 해서든 녀석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야 한다.”
기령의 외침에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상태론 몇 번의 칼질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소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토벌대 모두 그걸 알고 있기에 전투는 격렬해 졌다. 다른 토벌대가 몸으로 막다시피 하여 길을 열어주자 무기를 든 한명이 과감하게 파고들어 두억시니의 몸을 크게 베어 내었다. 거기에서 빠져나갔다면 좋았겠지만 조원들이 목숨을 버려 만든 단 한번의 기회를 이리 날려버릴 생각이 없는 듯 다시 몸을 돌려 이번엔 다리를 노렸다. 다행히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두억시니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지만 그걸 마지막으로 두억시니가 휘두른 팔에 곤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부대장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조원들의 도움으로 두억시니에게 다가간 부대장은 날렵하게 날아올라 역귀에 몸을 크게 세 번 베어내었다. 그걸 끝으로 재빨리 빠져나오려 하자, 두억시니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한번 팔을 휘둘러 대었다. 그 순간, 기령의 마지막 화살이 역귀의 몸에 박혔다. 두억시니가 고통에 발버둥 친 덕분에 부대장이 빠져나올 시간은 벌었지만 완벽히 몸을 빼지는 못했다. 결국 녀석이 휘두른 다리에 맞은 부대장은 피를 토하며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일어나긴 힘들어보였다.
“지금이다! 마무리 해!”
기령이 소리치자 마지막 무기를 든 토벌대원이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칼을 역귀의 몸에 아주 깊숙이 박아 넣으며 매달렸다. 다시한번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토해낸 두억시니는 격렬히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기운이 빠진 토벌대 몇 명이 말려들었고 녀석의 몸에 매달려 있던 토벌대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억시니는 마침내 그 거대한 몸을 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곧 경비대원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기령은 쓰러진 두억시니를 확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쩡히 서있는 토벌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부대장이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기령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희생은 말도 못했지만 결국은 해냈다. 역귀를 모두 무찌르고 마을을 지켜낸 영웅이 되었다. 이제 기령이 이장직을 맡는데 불만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피로감이 한번에 몰려왔지만 서둘러 이장댁으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장의 확답을 받을 생각이었다. 드디어 기령의 마지막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경비대장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누군가가 기령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장의 아들인 성철이었다. 아무래도 소란소리를 듣고 달려왔다가 역귀 토벌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역귀들이 다 쓰러진걸 보고 다가온 듯 했다. 이장을 쏙 빼닮은 그 눈매 때문에 늘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당당히 마주할 수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조금 힘들었지만 드디어 역귀 놈들을 모조리 무찔렀으니 이제 마을은 안전합니다. 이 기쁜 소식을 서둘러 이장님께 보고드려야 겠습니다.”
성철은 기령의 말에도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막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마침내 해냈다 싶었는데 상황이 꼬여 버린 것이다. 이장이 유언장을 남겼을까? 다행히 그 궁금증은 해소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경비대장님도 아셔야 할 것 같으니 함께 가주셔야 겠습니다. 뒷정리는 경비대에 맡기고 저와 잠시 이야기좀 나누시지요. 방금 큰일을 해치우셨으니 쉬게 해드리는게 마땅하지만 사안이 중대한지라 서두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장은 한번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니 유언장에 분명 명확히 해놨을 것이다. ‘역귀를 토벌한 경비 대장에게 이장직을 맡긴다.’ 라고 적혀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 기령은 경비대에 뒷정리 지시를 내리고는 성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