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발전해 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은 단지 변해가는 것일까?
세상이 좀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고 보는 것은 발전이라는 방향성에 가치평가가 가미된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이 변해가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세상이 발전한다는 것은 더 좋은 가치를 갖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니까요. 가치 평가를 통해 과거에 비해 더 나은 오늘이 되었고 더 나은 미래가 올것이라는 말은 시대에 대한 명확하고 절대적인 가치 평가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여 가능한 말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구석기 시대에 비해 신석기 시대가 더 발전하고 가치가 높은 사회이며, 조선시대에 비해 일제 강점기나 근현대 한국이 더 높은 가치를 포함한다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단지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 예를 들면 환경, 인구, 기후,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처하기 수월하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점차 변해가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방식은 신석기 시대의 인구를 떠받치기 적절한 방식은 아닐테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은 변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각 개별자가 겪는 세상의 상식은 또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각 시대별, 지역별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그리고 시대정신으로부터 많이 뒤쳐지면 세상에 적응할 수 없습니다. 1950년대 미국 백인이 2000년대로 시간여행을 해서 와서 흑인을 50년대 처럼 멸시하면 세상에 적응할 수 없고, 1970년대 한국 경찰이 2020년 한국으로 시간여행을 해서 피의자를 고문하거나 성추행한다면 바로 구속되겠죠. 그런데 시대정신에 발맞춰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을까요?
1930년대 40년대 독일에서 유대인을 탄압하고 멸시하는 것은 그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죠. 단지 시대정신을 따랐고, 관료로서 상부의 지시를 따른 것 뿐이며, 스스로 유대인을 죽이거나 괴롭힌 것은 없다고요.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주장합니다. 비록 아이히만을 악마로 보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봐서 유대인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긴 했지만 정말 영민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대의 상식을 따른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유가 부족하다면 악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사유라는 것은 동체대비의 심정.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대상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적어도 독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상식은 평범한 독일 사람들도 갖고 있는 상식은 아니었을지라도, 유대인을 탄압하는 정부에 눈을 감는 것은 상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민했던 네덜란드의 철도 기관사들은 파업을 통해 유대인 수송을 거부했고, 덴마크인들은 돈을 모아 유대인을 스웨덴으로 보냈으며, 불가리아인은 온몸으로 유대인 앞을 막아 그들의 이웃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시대정신을 따르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최근 배구계, 연예계에서 터지는 학폭사건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도 물론 학폭이 용인되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학폭은 만연했고 학폭이 존재함을 알면서도 눈을 감는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과거에는 특히 운동을 하는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최근의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아이히만이 그랬던 것처럼 학폭 가해자도 자신이 사유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아이히만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