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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온 기령은 눈앞에 놓인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게 역귀를 만들었다.”
한숨이 섞여 나오는 혼잣말이었다. 그 책이 마을을 지켜준것만은 확실했다. 책안에 적혀있는 몹쓸 주술덕에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역병들을 대신 받아줄 액받이를 만들 수 있었다. 액받이는 마을에서 쓸모없다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 이장이 선별하였다. 그렇게 선별된 액받이는 마을에 오는 모든 역병을 한몸에 받고 역귀가 되었다. 이장은 역귀가 쓰러질 때마다 새로운 역귀를 만들어 내었고 기령은 이장이 주술을 잘 걸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을 잡아와 역귀 만드는걸 도왔다. 몇 번이나 보았지만 기령은 아직도 마을 사람의 몸이 터져나가며 역귀로 변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언젠가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역귀가 죽지 않고 있었다. 반년정도면 주술의 힘이 다하여 죽어 마땅한 역귀가 죽지는 않고 점점 난폭해 지고 있는 것이다. 역귀는 이제 가끔씩 마을로 들어서려 하는 수준을 벗어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몇년전 부터는 경비대원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까지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비극의 시작에 불과 했다. 기령이 막 책자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그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대장님!! 역귀입니다. 마을 안에 또 역귀가...”
기령은 급히 활과 검을 챙겨들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찌된 일이냐?”
기령이 현장으로 달려가며 묻자 옆에서 따라오던 부대장이 대답했다.
“누가 길가에 쓰러져 있다길래 대원 몇 명이 달려갔습니다. 처음엔 그냥 술취한 사람인줄알고 일으켜 세우려는데 그사람이 갑자기 피를 토하면서 대원들을 밀쳐냈습니다. 그리고 몸이 찢어지더니....”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역병이 멈추고 나서는 더 이상 주술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얼마가 지나자 몇 달에 한번 꼴로 마을 안에서 누군가가 역귀로 변했다. 그 덕에 역귀는 하나 둘 늘어가더니 이제는 십수 마리가 되어버렸다. 경비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녀석들을 제압해서 마을 밖으로 쫒아내는 것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역귀가 마을로 침입한 거라고 잘 둘러대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람이 역귀로 변한다는걸 알게될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은 역귀와 경비대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코를 찌를듯한 역귀의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짧은 다리와 두꺼운 몸. 마치 불에 달군 인두로 온몸을 지진 듯 끔찍하게 일그러진 피부. 그 피부에선 피와 진물들이 흐르고 있었고 녹아내린듯한 얼굴에선 고통에찬 신음과 같은 울음소리가 나고 있었다. 기령은 침착하게 지휘를 시작했다.
“제일 가까운 북쪽 문으로 놈을 몰아! 그쪽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다 대피 시킨다. 맨 앞줄은 창병이 나서서 놈이 가까이 못오게 막고 활가진 놈들은 뒤에서 견제해. 절대 길 터주지 말고 밖으로 쫒아.”
이제 기령의 명령에 주저함은 없었다. 곧 경비대원들이 일사분란 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역귀를 제법 오래 상대한 베테랑임에도 역귀의 무지막지한 힘과 절대 죽지않는 몸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해야 했다. 역귀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 때 마다 창병들이 견제를 해주었고 멀리서는 궁병들이 지원을 해주었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역귀는 마을 외곽으로 빠지고 있었다.
“거의 다 됐다. 마을 밖으로 몰아!”
어느새 문을 지나 역귀는 마을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제 역귀를 쫒아버리고 무사히 마을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면 되는 것이다.
“궁병들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 방벽 안에서 엄호한다. 창병들은 둘씩 짝지어서 역귀에게서 멀어져. 절대 가까이 가지 말고 먼저 공격하지도 마.“
기령의 명령에 경비대원이 즉시 움직였다. 그렇게 다들 역귀에게서 멀어져 긴장이 풀리려던 그 순간, 역귀가 갑자기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대원중 한명에게 달려들었다.
“쏴! 가까이 못오게 해!”
하지만 수십발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역귀는 멈추지 않았다.
“피해! 뒤로 뛰어!”
두려움 탓에 기령의 외침을 듣지 못했는지 대원은 눈을 질끈 감고 창을 내질렀다. 푸욱 하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역귀를 막지는 못했다. 다시 한번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 역귀는 창에 찔린 상태 그대로 그 대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대원의 온몸을 잡아 찢기 시작했다.
“정지! 모두 물러서! 너무 늦었다.”
기령의 명령에 다급히 움직이려던 대원들이 모두 멈춰섰다. 그리고 역귀의 끔찍한 행동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귀는 조각낸 대원의 몸을 마치 치장이라도 하듯 몸에 붙여넣고 있었다. 반쯤 으깨진 팔을 몸에 붙이고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일그러진 표정을 한 얼굴을 어깨에 가져다 붙였다. 몸통에서 쏟아져 나온 것들을 죄다 주워 담아서 팔과 다리에 나눠 붙였고 나머지 조각들 역시 모두 역귀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대원 하나를 모조리 찢어 붙인 역귀는 만족스럽다는 듯 괴성을 지른 후 산쪽으로 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장례를.... 준비 하겠습니다.”
침묵을 깨고 기령의 옆에 있던 부대장이 말했다. 기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몇 명 째지?”
“마을사람이 열다섯에 경비대가 열일곱. 전부 합쳐서 서른두명 째입니다.”
희생자가 점점 더 늘고 있었다. 반대로 역귀의 수는 점점 늘고 있었다. 역귀는 망가져가는 몸을 대체하려는 것인지 희생자의 뼈와 살을 자신의 몸에 가져다 붙였다. 그 덕에 안그래도 끔찍했던 역귀의 모습은 더욱더 끔찍해졌다. 가장 희생자를 많이 낸 역귀는 마치 사람 서넛을 한데 뭉쳐버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피해자가 늘어간다면 마을은 얼마안가 끝장나 버릴게 분명하다. 이제는 정말 답을 찾아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기령은 가만히 책을 살펴보았다. 글조차 모르는 무지렁이였지만 경비대일을 하면서 이장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쓸일이 그다지 많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장은 그때부터 자신을 차기 이장으로 염두해 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장. 그 한마디에 기령의 마음이 움직였다. 고작 이장이라지만 이 마을에서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은 컸다. 경비대장이 되고 나서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올려보니 욕심이 생겼다. 이장이란 한마디가 주는 힘이 어찌나 컷던지 방금전에 역귀에게 끌려가던 대원의 모습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기령은 애써 머릿속에서 잡념을 떨쳐 내었다. 이러나 저러나 역귀를 없애는게 급선무였다. 이 책에는 방도가 있을게 분명했다. 이장이 괜히 이 책을 자신에게 넘겨줬을리 없다. 기령은 천천히 책을 열고 가만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역귀를 잡을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무슨 짓이든 하겠다. 수십명이 죽는한이 있더라도 꼭 해내고 말겠다.”
그렇게 말하는 기령의 눈은 마치 괴물과도 같이 섬뜩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