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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귀 - 7장. 그릇
게시물ID : panic_1021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eptunuse
추천 : 2
조회수 : 6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2/09 17: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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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님, 이장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경비대원의 말에 기령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함께 순찰을 돌던 순찰대에게 말했다.

“잠시 다녀올테니 마저 부탁하네. 혹시라도 무슨일이 생기면 바로 날 부르게.”

순찰대가 떠나자 기령은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르신. 경비대장입니다.”

“기령이 왔는가? 안으로 들어오게.”

이장은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는지 바닥에 누운 채 고개도 들지 못하고 기령을 맞았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내 긴히 할말이 있어 바쁜걸 알면서도 이리 불러내었네. 잠시 시간좀 내어 주겠는가?“

이장의 말에 기령은 긴장한 채 마음을 다잡았다. 십년 가까이 이장을 모시면서 이렇게 대면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한번도 가벼운 이야기를 꺼낸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이런 자리는 어려웠다. 게다가 나이탓에 많이 약해졌음에도 이장은 여전히 기령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간 자네가 마을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네. 내 부탁에 마을 경비대원이 되어서 공도 많이 쌓았고 이제는 내가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듬직한 경비대장이 되었네. 자넨 정말 우리 마을에 없어선 안될 중요한 인재야.”

십수번도 더들었던 그말에 기령은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이장이 저말을 할때면 언제가 힘겨운 부탁이 뒤따라왔다.

“자네. 지금 우리 마을 상황이 어떤지 아는가?”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기령이 모를리 없었다. 기령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이장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어르신. 온 나라를 휩쓸던 역병은 3년전에 다 사그라 들었습니다. 병에 걸려 죽은이도 많고 굶어죽은 이도 많았지만 우리 마을만은 무사했습니다. 저희가 역귀를...”

잠시 주저하던 기령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서 이야기했다.

“역귀를... 잘 막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역병위협이 사라져서 마을간 왕래도 할 수 있으니 마을이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아직 역귀들이 사라지지 않아서 애를 먹고 있습니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역병은 수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역귀만은 아직 남아서 여전히 마을의 위협이 되고 있었다.

“그래, 다행히 역병이 진정되었지. 하지만 역귀는 여전히 골칫거리네. 없애보려 노력해 봤지만 그리 쉽지 않았지. 안그런가?”

기령은 다시금 땅이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황망히 고개를 조아렸다. 마치 이장이 자신에게 불호령이라도 내린양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실제로 역병이 사라지고 나자 이장은 역귀를 없앨 것을 명했다. 하지만 역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기 시작하더니 언젠가 부터는 무슨짓을 해도 죽지 않았다. 아무래도 역병이 강할수록 역귀가 약해지는 듯 했다. 그러니 역병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은 역귀가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해버린 것이다. 오래전 기령이 던진 단검에도 힘을 못쓰던 것과는 달리 이제 역귀들은 칼에 베여도, 물에 빠져도, 불에 태워도 끝끝내 살아났다. 그렇지 않아도 흉측한 모습이 더욱더 끔찍하게 변할 뿐 기령이 경비대장을 맡은 이후부터는 단한마리의 역귀도 죽이지 못했다. 게다가 역귀들은 점점 더 난폭해지고 다루기 어려워졌다.

“내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마을의 안전을 해치는 역귀를 없애는 것이네. 역귀만 사라진다면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죽고 나면 자네가 마을을 책임져 줬으면 하네.”

기령은 놀란 듯 고개를 들고 이장을 바라보았다.

“어.. 어르신 그 말씀은?”

“그래. 난 자네가 차기 이장으로서 우리 마을을 잘 이끌어 줄 수 있을거라 믿네. 물론 역귀건만 잘 해결 된다면 말이야. 만약 역귀가 계속 마을 주변을 맴돈다면 아무래도 자네가 경비대를 계속 지키는게 더 안전하겠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장직은 못난 내 아들놈에게 맡기는 수밖에.”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기령은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까지 역귀를 죽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걸 해보았지만 실패했다. 그나마 가둬보려는 시도들은 몇 번 성공했지만 쇠창살도 부수는 역귀의 무지막지한 힘 덕에 결국엔 잡아두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쉽지 않으리란걸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일을 잘 처리할 거란것도 알고있지. 그러니 이제 자네에게 이걸 주려고 하는 것이야.”

이장은 머리맡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내밀었다.

“모든 죄는 내가 지고 가겠네. 그러니 자네는 마지막만 잘 처리해 주게.”

이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기령은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이장이 잠시 보여줬던 책. 이장의 조모님 방에서 찾았다는 주술들이 담긴 그책. 그리고 이장과 자신을 포함한 극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 담긴 책. 기령은 말없이 책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경비대장님. 와계셨습니까?”

밖으로 나온 기령은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장의 아들 성철이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과 닮았다고들 이야기 하는 성철이었지만 특히나 눈매는 아버지와 똑같은 날카로움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기령은 나이가 더 많음에도 늘 성철에게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성철이 언제나 존대를 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네. 이장님을 잠시 뵙고 지금 돌아가려 합니다.”

방금전 이장의 말 때문인지 왠지 기령은 성철에게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때문에 기령은 성철의 눈을 마주보는 대신 그가 들고있는 녹색 천조각들로 시선을 옮겼다.

“아 이건 완장을 만들 천입니다. 경비대도 뭔가 표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아버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한번 만들어 보려고 챙겨왔습니다. 완성되면 경비대장님께도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령의 시선을 느낀 성철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언제나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능력이 없으니 이런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요. 경비대장님이야말로 마을 일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혹시 제가 도울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거라면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기령은 감사를 표하며 자리를 피했다. 성철은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이장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아는 것이 많았고 실수를 하는법이 없었다. 당연히 모두가 차기 이장의 자리는 성철에게 돌아갈거라 생각했지만 무슨 일인지 이장은 성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아들 녀석은 좋은 그릇이 되지 못하네. 총명하고 배움은 깊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부족해.”

예전에 이장이 지나가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장은 기령을 이장의 그릇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기령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조금씩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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