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어그로였습니다. 중간에 나오는 얘기긴 하겠지만 웃기려고 해봤습니다. 웃기지 않았다면 정말 대단히 죄송합니다.
니체의 정치 철학에 대한 비판 글을 읽었을 때 잘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7302&s_no=17302&page=1
이 글을 읽고 나서 제가 부족해서 이해를 못했거나 아니면 글쓴 분이 니체를 오해해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글을 여러번 읽어보고 머리 속에 넣어두고 항상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언듯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확실히 제가 부족해서 이해를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ㅎㅎ. 그래도 뭔가 깨달음이 생기고 뭔가 밝아지는 느낌이 드니까 마치 어려운 화두를 풀어낸 듯 쾌감이 어마어마하게 크군요.
니체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계약론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존립 근거에 대한 고민을 통해 발생, 발전합니다. 국가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죠. 사회계약론은 결론적으로 국가 구성원의 필요에 의해 국가를 만들고 국가 안에 종속되는 것을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계약을 통해 동의했다는 이론입니다. 사회계약론은 주장한 사람의 의도가 약빨 떨어진 왕권 신수설을 대체하여 군주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주장되었느냐, 귀족 부르주아의 정권 획득을 위해 주장되었느냐, 혹은 민중의 자유를 위해 주장되었느냐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고 다른 주체를 통해 이용됩니다.
먼저 홉스는 전제 군주의 권위를 위하여 국가가 생기기 전의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로 규정합니다'. 자연상태는 투쟁의 상태이므로 국가라는 폭력 독점 주체를 상정하여 구성원들을 개별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이 국가를 계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전제군주제를 옹호하게 되고, 전제군주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습니다. 로크는 귀족을 비롯한 엘리트 계층의 지원을 받아(샤프츠베리 백작) 자연상태가 홉스가 예상한 것처럼 그렇게 전쟁상태는 아니었으며, 자율적으로 국가를 계약한 만큼 이유가 있다면 다시 계약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하여, 절대적인 왕권보다는 왕정 전복의 가능성을 긍정합니다. 루소는 국가 이전의 자연상태를 자유롭고 조화로운 상태로 보고, 사회계약을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향유하던 자유를 지속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묘하게 고대 중국의 인성론과 공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인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모두 알다시피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이 대표적이죠.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한다면 사람들이 선해져서 국가가 안정될 것이라고 봤습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다면 안타까워 하는 측은지심은 이득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이므로 누구나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인, 의, 예, 지)이 본성에 있다고 봤습니다. 순자는 인간은 누구나 욕망이 있고 재화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본성에만 맡긴다면 전쟁같은 아수라장이 될것이므로 외부적인 통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자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직시했다고 볼 수도 있죠.
하지만 인성론에는 성선설, 성악설 말고도 수없이 많은 학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고자가 상당히 특이하다고 할 것입니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고 봤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물은 역동적이고 동쪽으로 물길이 터지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물길이 터지면 서쪽으로 갈 뿐, 물에게는 동쪽이든 서쪽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한것은 물의 역동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성도 선이든 불선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을 본성이라고 말하죠. 이 부분에서 고자에게서 강한 니체의 냄새를 맡게 되어 비로소 위에 쓴 글에 대한 깨달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사회, 정치적 관계에서 인성을 논하는 것이고 성무선악설은 사회, 정치적 관점을 떠나 개체에 집중한 것이죠. 그러므로 성무선악설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중간적인 입장이 아닌 반대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사회계약론으로 돌아가면 홉스와 루소는 대척점에 있어서 홉스가 매운맛 카레라면, 루소는 순한맛 카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홉스나 루소 모두 사회계약론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듯 합니다. 결국 사회계약을 긍정하고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죠.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본다면 어차피 둘다 카레일 뿐 짜장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였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은 루소를 조롱하듯 비판하고, 푸코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국가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니체의 정치철학이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체주의는 국민을 외압을 통한 강제적 복종상태로 만듭니다. 민주주의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간접민주주의 혹은 대의적 민주주의는 서로간의 동의하에 자발적 복종상태로 국가를 유지 합니다. 강제적이든 자발적이든 복종상태에 있는 것이죠. 니체의 철학은 자발적 복종마저 거부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에 큰 착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하고 자유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여 국민은 국가의 덕을 보면서 살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국가와 권력은 국민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국민들의 복종을 통한 권리 유보를 얻고, 국민들의 의무를 통해 국가가 먼저 국민들 덕을 본 후 남는 자원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것 뿐입니다. 물론 상호 보완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일방적으로 국가가 국민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국민들의 권리를 국가에 유보한 이후의 시점만 본 것이죠.
대의적 민주주의에서도 분명히 직접적으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시점은 있습니다. 바로 민주주의의 꽃 선거입니다. 국가는 국가의 권리획득 과정에 마치 국민들이 나서서 국가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것과 같은 환상을 선거를 통해 심어줍니다. 선거가 국민들의 권리 표현이라는 것이 환상이라는 말은 선거는 결국 객관식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대표를 뽑는 것 같지만 국가와 권력이 정해준 후보 중에서 국가와 권력이 알려주는 정보를 통해 뽑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독재자를 뽑을 권리라고 볼 수도 있겠죠. 실제로 1930년대 일본과 독일은 도조 히데키와 히틀러에게 비록 군부의 뒷심과 정치 선동이 있었지만 아주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양합니다. 대의적 민주주의의 한계가 보여진 극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최근 브렉시트 사태에서 리차드 도킨스가 "난 경제학자가 아닌데 왜 브렉시트 안건에 투표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다수결 지상주의의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를 가진 현대 국가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어불성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강신주는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가 아니라 시위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의 법과 제도는 한가지 철학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양한 철학들이 어우러져 법과 제도, 절차가 만들어질 것인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정치철학, 철학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어서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니체적인 정치철학이 대의적 민주주의와 어우러질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국민소환제도를 강화하거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더 폭넓게 보장해주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