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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철학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긍정하고 쾌락에 따라 행동할 것을 주장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우정과 사랑을 위하여 자유롭기를 염원한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단어 epicurean이 쾌락주의자 혹은 향락주의자라고 해석되는 것을 보면 에피쿠로스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하기 위한 3요소로 우정, 독립성, 사색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성욕이나 큰 집, 멋진 음식 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하죠.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고통스러운 원인을 마음의 번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번뇌로부터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하여,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자유롭게 살면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것이죠. 마치 석가세존을 보는것 같습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삶과 죽음은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죽음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니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죽음과 같이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죽는다면 어차피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도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죠. 또한 자유를 잃고 노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상태이므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것도 긍정합니다. 극단의 자유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상태! 이 부분에서는 동양의 자화자라는 양주학파 철학자가 한 말이 거의 맥을 같이 합니다. 온전한 삶이 첫번째, 부족한 삶이 두번째, 그 다음이 죽음, 그리고 마지막 네번째는 핍박받는 삶이라고 했으니 자유롭지 못한 굴종상태를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일맥상통한다고 봐야 하죠.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층에 이것보다 무서운 존재가 있을까요?
인간의 자유를 극도로 추구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그래서 가능한 모든 사회 금기에 도전을 합니다. 이 부분이 혁명의 절정을 이루는 듯 합니다. 노예를 부정하고,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생각하며, 당연하게 빈부차이나 권력의 위계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교외에 에피쿠로스 정원을 만들어서 공동체 구성원의 동등한 지위를 통한 우정을 나누며 푸성귀에 만족하고 같이 일을 하고 같이 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는 노예도 없고 창녀도 없이 인간 대 인간의 우정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 혁명적인 사상이 노예를 경제의 기반으로 삼던 고대 사회에서 핍박을 받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래서 지금 에피쿠로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루크레티우스라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가 남긴 저서가 운문으로 되어 있어서 에피쿠로스학파 철학서가 아닌 문학으로 구분이 되어 많이 남아서 후대에 희미하게나마 그 기록을 남겨주게 되었죠. 니체도 그 기록을 통해 에피쿠로스를 접하고 에피쿠로스를 초인의 모델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끊임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추구하고, 행복을 위해서 살면서(힘에의 의지), 우정을 나누고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면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 여기에서 니체가 되기를 바랬던 초인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니겠죠.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도 20세기 초반 미국의 여러 금기가 등장합니다. 여자는 치마를 입고, 술, 담배를 해서는 안되며, 남자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하고,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삶의 무게를 갖으며, 같이 식사를 할 수도 없으며 점잖은 사람은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그러한 금기 속에서 주인공 잇지는 바지를 입고 남자애가 놀리면 주먹을 날려서 멍들게 하고 아무리 거대한 남자가 위협을 해도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항을 합니다. 교회를 감옥과 같이 생각하기도 하죠. 그리고 휘슬스탑카페를 만들어서 흑인과 함께 요리를 하고 흑인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접시 음식을 주기도 합니다. 그 카페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kkk단이 습격을 하기도 하고, 교회에 나오기를 촉구하는 사람도 있으며, 잇지에게 결혼하자고 들이대는 덩치 큰 남자도 나옵니다. 하지만 그러한 강요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며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인 루스와의 우정과 사랑을 키워나가며 휘슬스탑카페를 지켜 나가죠. 그러다 루스를 때리던 전남편 사망과 관련하여 재판을 받을 때 조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변을 합니다. 거의 모든 금기를 부수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초인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는 식인이라는 금기도 깬듯한 암시도 있죠.
그러한 사회의 부조리한 금기 혹은 특정계층에 대한 차별과 압박은 20세기 초의 일만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20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휘슬스탑카페를 아는 노인과 20세기 후반의 중년여성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중년여성은 잇지와 루스의 수십년 전 모험과 같은 얘기에 빠지지만 사실 20세기 후반이 되어서도 사회의 금기와 억압은 여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잇지처럼 자신을 바꾸고 삶을 바꾸려는 인물로 변해가게 됩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와 진짜 진보적인 영화구나. 페미니즘과 인종차별주의 뿐만 아니라 빈부의 격차와 종교에도 대항하는 영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뜬금없는 식인 암시에 이 영화의 의도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휘슬스탑카페가 사라지고 마을 자체가 쇠락한 부분에서 휘슬스탑카페는 단순한 카페가 아닌 공동체, 특히 에피쿠로스 정원이 연상이 되었죠. 감독이나 원작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제가 확대해석을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잇지는 니체가 추구하던 초인의 삶을 살았고, 그 영향을 20세기 후반 중년여성에게도 미칩니다.
주인공 잇지와 시종일관 대립하게 되는 잇지를 좋아했던 백인 보안관과 목사가 결정적인 순간에 잇지와 휘슬스탑카페를 도와주는 것은 이 세상에 갖을 수 있는 희망의 코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