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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짱짱맨이었던 나라 동진(東晉) - 下
게시물ID : history_150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11
조회수 : 151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3/28 18: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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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이란 나라를 보노라면 중국사에서 그닥 존재감은 없는 나라입니다. 한, 당, 송, 명 처럼 이런 굵직굵직한 왕조들이 유명한데에는 이들 왕조가 통일왕조여서 이름을 날린 감도 있지만 각 왕조마다 한두명씩 네임드 황제들이 여럿 있어서이기도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때 동진은 이렇다하게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군주가 아예 없었던 나라입니다. '아예' 라는 극단적 표현을 써도 무방할 정도로 동진은 왕권보다는 신권이 주로 스포트라이트 받는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인데요. 동진이 존속했던 시대인 위진 남북조 시대 자체가 주로 왕권보다는 신권이 우세한 귀족사회 시대였던지라 따로 언급할 부분은 없습니다만  이렇게 황제가 힘 한번 못 써보고 찌그러져 살던 나라는 중국사 통틀어서 거의 유일무이하지 않나 하네요.
 
그리고 그 배경은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애초에 동진의 건국시조 원제(元帝) 사마예부터가 신하들에게 추대되어 황제가 된 케이스고 영가의 난이라는 난리 도중에 엉겁결에 권력기반이랄게 없다시피 하던 타지에서 나라를 세운 꼴이었으니 이건 뭐 힘을 써보려 해도 쥐뿔도 없는 처지였던지라 토착세력 및 북래귀족들의 지지와 기반을 토대로 통치할 수 밖에 없던 실정이었던 거죠.
 
즉 스타트부터 잘못 끊는 바람에 원제 사마예 아래로는 역대황제들이 줄줄이 권력고자로 살게되었던 겁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 외에도 역대 황제들이 줄줄이 요절하는 사태가 한몫하기도 했습니다. 원제 사마예 다음으로 즉위한 명제(明帝) 사마소를 시작으로 성제(成帝) 사마연, 강제(康帝) 사마악, 목제(穆帝) 사마담, 애제(哀帝) 사마비에 이르기까지 무려 5대가 20대를 넘기지 못하고 줄줄이 요절해버립니다.
 
뭐 암살당하거나 어디 전쟁나가서 전사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희한하게 무슨 저주에도 걸린 것 마냥 이렇게 죄다 요절해버렸던 것인데(여기서 애제 사마비는 논외로 두겠습니다. 도교에 심취한 나머지 불로장생하겠답시고 수은만 들이켜댔으니 일찍 안죽고 배기겠나요) 이는 결국 황제의 권력이란게 미처 성장할 틈이 없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요인이고.. 주된 요인은 동진 초부터 시작된 귀족 및 호족들의 정계장악입니다.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애초에 낭야 왕씨라는 명문귀족 가문을 필두로 여러 귀족 및 호족들 가문에 기대어 건국된 나라인지라 이들 공신가문들은 이들을 무시하고는 나라가 굴러가지 않을 수준의 영향력과 파워를 지닌 정치집단이었기에 이 공신가문들을 숙청하고 황권을 키운다.. 이런 시나리오는 시도하기는 커녕 그런 일을 시도할 만한 기반도 없었을 뿐더러 그랬다가는 되려 칼맞고 요절하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이런 탓에 동진은 시기별로 어느 특정 가문이 득세하는 모양새를 보입니다. 동진 초에는 바로 이 낭야 왕씨 가문이 그 주인공이었고요. 이 사람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배경은 바로 위에서도 말씀드렸고 앞서 전편에서도 밝힌 바 있어 따로 언급은 않겠습니다. 낭야 왕씨 가문의 왕도를 비롯한 왕씨일족은 원제 사마예를 보좌하여 동진의 정치를 주도해나갑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어찌나 강했던지 오죽했으면 당시 동진에서는 "왕씨와 사마씨가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 라는 말이 나돌정도였다고 하니 알만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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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동진의 명재상이자 건국공신입니다.
일찍이 사마예가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으면 나에게는 왕도가 있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사마예가 죽고는 못사는 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도 역시 권력의 최정점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예와의 의리를 지켜 역모나 이런 불순한 의도를 품지도 않았고요.
다만 그의 사촌형인 왕돈이 대신 뒤통수를 치지요.
 
'나라를 공동으로 다스린다' 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닌게 이들 낭야 왕씨 가문은 가문의 일족 대다수가 중앙정계는 물론이고 지방직에까지 곳곳마다 진출하여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으니 동진의 요직이란 요직은 거진 낭야 왕씨 가문 사람들로 채워졌던 것이죠. 여기서 살짝 뻥튀기하자면 그냥 동진 시대 기록들 중에 왕씨 성 가진 관료가 있으면 낭야 왕씨라 봐도 무방할 정도랄까요. 심지어는 이 동진 이후 세워진 송(宋), 제(齊), 양(梁), 진(陳) 등의 남조 역대 왕조시기까지 이들 낭야 왕씨 가문은 계속해서 벼슬을 살았습니다. 여담으로 흔히 서성(書聖)으로 불리우며 서예의 역사에 한획을 그은 왕희지(王羲之)도 낭야 왕씨 가문 출신이며 왕도의 조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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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사실 왕희지가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삼촌 왕도의 빽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음덕이라 하죠. 이 음덕 덕택에 잠깐 벼슬을 살았던 왕희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곧 사표던지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택합니다.
 
 
이렇듯 동진의 명실명백한 최고 권력가문 낭야 왕씨도 바로 위에서 밝혔듯 왕도의 사촌형 왕돈(王敦)의 반란으로 하락세를 겪게 됩니다. 반란의 이유는 군주 사마예의 노골적인 견제가 아니꼬워서. 물론 명분은 "황제의 주변에서 설치는 간신배들을 주살하러 간다!" 라는 뻔한 레퍼토리입니다만 이게 그럴듯한 말장난이란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죠.
 
 이걸 보면 사마예도 아주 권력고자로만 살지는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동진 역대 황제들 중에 그나마 나름 황제노릇 했던 이들 중 하나가 건국군주 사마예인데 이 사마예도 행적기록을 보면 권력에 있어서는 도태되지 않으려 한 시도가 종종 보입니다. 자신도 낭야 왕씨 가문이 지나치가 번성하는 걸 꺼려했던 것인지 재상 왕도의 사촌형이자 군부의 최고 통수권자인 왕돈을 숙청하려 들었습니다만 왕돈도 이러한 낌새를 눈치채고 휘하 세력을 거느리고 중앙정부에 대항합니다.
 
이 내란으로 도중에 원제 사마예는 홧병으로 병사하고 뒤를 이은 명제 사마소의 대에 비로소 왕돈은 토벌됩니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때 왕돈의 반란군이 동진의 수도 건강까지 손에 넣다시피하고 왕돈 본인은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 조정대신들을 숙청하고 정국을 좌지우지 했다라는 점인데요. 물론 당시 왕돈이 동진 군부의 최고 통수권자 자리에 있었기에 그만한 병력을 휘몰아 수도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는 하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동진 중앙정부나 황제의 힘이 미약했음을 알 수있는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 잘나가던 왕돈도 결국에는 명제 사마소의 토벌로 패사합니다만 이 토벌도 사실은 명제 사마소가 주위 유력가문들에게 손벌리고 부탁해서 얻어낸 협조로 이루어진 토벌인지라 결과적으로 또 여기서 내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때 왕돈의 토벌에 협조하여 공신이 된 소준, 조약이란 인물들이 공신이랍시고 껄떡대다가 결국에는 역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죠.
 
이 당시 동진의 황제는 명제 사마소에서 성제 사마연에게로 넘어가 있었는데요, 성제 사마연의 조부 원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군이 두려워 그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회유하는 선에서 끝내려 했다라지만 이 손자의 대에는 회유는 커녕 아예 반란군들에 의해 감금되어버리는 신세가 됩니다. 폐위만 안당했다 뿐이지 사실상 황제로서의 체면이나 권위는 구길대로 구겨진 것이었죠. 결국에는 소준, 조약도 역시 성제 사마연의 호소로 일어난 다른 유력가문 및 군벌들의 연합공격으로 박살이 나고 패사합니다만, 그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이때부터 슬슬 동진의 황제란 존재는 무슨 개뼈다구만도 못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역적하나 처리하는 것도 황제가 주위 신하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 병력으로 물리쳐야 하는 꼴이니 어련했을까요.
 
 
그리고 제가 위에서 '군벌' 이란 표현을 썼는데요, 이는 앞서 전편들에서 다루어 본 바 있습니다. 북래귀족들과 역시 북방에서 남하해온 이주민들의 정착을 그 시초로 볼 수있는 이 군사집단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군벌화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무렵 동진 초기를 넘어서 중기에 이르기 시작하면 흔히 서부군, 북부군으로 불리우게 되고 역사적으로 동진의 주력군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요.
 
그리고 나라지키라고 쥐어준 칼이 나중에는 훗날 나라를 작살내는 칼로 되돌아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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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동그라미 친 두 곳이 대략적으로 서부군, 북부군이 주둔해있던 위치입니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중앙정계에 새롭게 등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환온(桓溫)이란 인물입니다. 이 환온 역시 당시 동진의 고위 권력층 대다수가 그렇듯 그의 가문인 초국(焦國) 환씨 가문 또한 북방에서 남하해온 귀족가문으로, 이 초국 환씨가문이 그전까지 실세 가문이었던 낭야 왕씨를 제치고 동진의 최고 실세가문으로 등극하게 되는 때도 바로 이 환온부터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초국 환씨 가문은 삼국시대 위(魏) 왕조의 황족인 조상(曹爽)의 심복이었던 환범(桓範)이 그 시조라고 하는데 썰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저것 따져봤을때 아마 정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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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삼국지12에서의 환범.
 
그전까지는 명문가라고는 하나 원체 낭야 왕씨네가 번성했던 탓에 그닥 빛은 못보던 가문이었지만 환온의 아버지 환이가 앞서 말한 소준, 조약의 난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공신가문으로 폭풍출세했던 덕에 동진에서 나름 알아주는 네임드 가문이 되었던 초국 환씨 가문은 이 환온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이름을 날리고 권력을 쥐게 되자 명실명백한 최고위 가문이 됩니다. 거기다 명제 사마소의 딸과도 혼인하여 황실의 부마가 되기도 했고요.
 
환온은 우수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무관직에 종사, 나중에는 군부의 통수권자가 되어 주로 대외정벌에 주력하여 북으로 서로 정벌활동을 통해 동진의 영토를 엄청나게 불려놓는 전공을 세웁니다만 다만 국내에서는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되어 군림합니다. 5대 황제 강제 사마담의 대부터 8대 황제 간문제 사마욱에 이르기까지 당시 여러 황제들을 핍박하고 기존의 권력고자 역할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며 떵떵거렸던 것인데요, 말그대로 핍박하다 못해 7대 황제인 폐제 사마혁의 경우에는 아예 폐위시켜버리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구실이라도 대서 그랬다면 모를까 그냥 마음에 안들어서 폐위시켜버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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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온의 북벌도.
 
이 시기에 화북으로 깊숙히 들어가 서진(西晉)시대의 도읍 낙양도 탈환하는 등 선전합니다.
 
 
"사나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겠누?"
..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시작된 환온의 그 유명한 땅따먹기는 수년에 걸쳐 이루어졌고 환온은 당시 화북의 5호 16국 시대의 여러 국가들, 후진(後秦), 전연(前燕), 전진(前秦)을 비롯한 다른 몇몇 국가들을 두들겨 팼고 성한(成漢)은 아예 먹어치웠습니다.환온의 이러한 불꽃 싸닥션으로 후진, 전연 등 여러 국가들은 얼얼해진 뺨을 어루만지며 깨갱했고요. 이후 동진 말에 이루어지는 유유(劉裕)의 북벌과 더불어 이 환온의 북벌은 동진의 대외정벌 활동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환온이 북벌을 시행했던데에는 영토를 불려 나라에 이바지하겠다는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개뿔 한마디로 제위찬탈을 목적으로 노리고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논리는 간단합니다. 황제의 자리를 요구할 만한 공적, 즉 건덕지가 있어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던 것이죠. 그래서 7대 황제 폐제 사마혁도 쫓아낸 것이고, 8대 황제 간문제(簡文帝) 사마욱한테는 대면하여 노골적으로 황위를 요구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습니다만 사마욱이 "진(晉)의 운이 여기까지라면 그대가 마음대로 해도 좋으나 다만 그 운이 좀더 길다면야 그대는 응당 이 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라는 발언으로 패기를 시전하자 이에 뜨끔한 나머지 목표로 하던 제위찬탈에서 한발자국 물러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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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문제(簡文帝) 사마욱.
 
원제 사마예의 아들입니다. 건국시조의 아들이 이제서야 8대째에 이르러 황제노릇하고 있으니
살짝 의아하기도 합니다만 지가 하기 싫었다 합니다. 어찌보면 환온에게 인정에 호소하여 제위찬탈은
면한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래도 그게 어디랍니까. 찍소리 못해보고 쫓겨난 7대 황제 폐제 사마혁보다는 양반이지요.
 
 
 
 
좀 길어지는 감이 있어 나머지는 마지막편에서 마저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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