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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742년경 당의 주요 번진들
게시물ID : history_150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8
조회수 : 131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3/28 09:58:10

캡처.JPG

[1]


글에 앞서 본 표는 742년경의 당의 주요 번진들의 현황입니다. 시기라고만 적혀졌는데 저건 각 번진이 설치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기존의 부병제 제도가 당고종 이후 균전제의 붕괴와 기미지배체제 파괴로 인하여 무너지면서 당 중기 이후 새로운 군사제도의 도입이 강력하게 요청됩니다. 그렇게 해서 도입된 것이 위의 표에서 드러나듯이 절도사 체제였습니다. 절도사 체제에서 병사들은 단결병(團結兵)(또는 단련병(團練兵)), 관건병(官健兵)이 바로 그것이며, 단결병은 징병제로, 관건병은 장정건아제라 불리는 모병제로 징집하였으며 이들을 통솔지휘하는 것이 바로 절도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절도사 체제는 당 현종 천보 연간에 완성이 됩니다. 

 

북정 • 안서번진은 기존의 도호부 위치와 일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남 • 삭방 • 평로번진은 각각 그에 대응하는 안남 • 안북 • 선우 • 안동도호부에서 뒤로 물러난 지점에 설치되었고, 범양 • 하동 • 농우 • 하서 • 검남번진의 경우 어느 도호부에도 대응하지 않고 새롭게 당왕조의 방위선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범양 • 하동 • 삭방번진은 장성 내부에 설치되어 당왕조의 최후 방어선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742년 무렵에 번경 10개 번진의 총병력은 약 49만에 이르렀고, 전투마는 8만 여두 정도였습니다[2].

 

그리고 이들 번진을 지휘하는 절도사들의 출신들은 대개 이러했습니다.

 

① 귀족과 과거관료를 표함하는 문관

② 위사와 확기[3]를 수도에서 통솔한 12위[4] 장군과 절충부[5] 출신의 상급무관

③ 군진의 하급장병으로부터 승진한 무인

④ 이민족

 

이러한 출신들에 따라 번진에 임명되는 절도사들의 구성도 두가지로 갈렸습니다. 가령 북방 전선에서 이민족과 맞써야하는 안서 • 북정 • 하서 • 농우 • 평로 같은 경우에는 무관 • 무인계가 압도적이었고 때때로 이민족계도 있었습니다[6]. 이에 반해 장성 안쪽에 위치한 삭방 • 하동 • 범양번진이나 서남부의 검남 • 영남번진의 경우 문관 출신이 압도적이었습니다.




[1] 그 밖에 복건 해안지대의 복주, 산동반도 북안의 래주와 등주에 합계 3개 소의 부대(각 부대 병력은 1000명~1500명)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2] 그에 비해 좌우 우림군을 중심으로 한 수도인 장안성을 방어하는 병력은 10만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3] 확기(擴騎)

원래 수도 근번의 부병은 위사(衛士)라고 불렀습니다(부병의 임무 가운데에 수도 근번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위사는 부병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722년경이 되면서 「당시 위사는 점차 빈약해지고 도망하여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상당수 붕괴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재상 겸 병부상서였던 장열은 위사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써 수도경비병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이를 계기로 725년에 확기(擴騎)라는 새로운 병종이 정원 12만 명으로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에 장열이 제시한 것과는 달리 기존 위사제와 거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번에 1개월씩,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징병제였습니다. 정원 12만명 중 6만 6천명이 징병정원이었으며 그 징병 지역도 장안과 낙양을 잇는 협향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병 • 단련병과 병모와 건아 등은 원칙은 부유농가에서 장남이 많은 집을 우선 징병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만 확기제는 원칙 그 자체가 9등호를 주체로 하고 그것으로 정원을 채울 수 없으면 8등호에서 징병하고, 후사를 이을 정남이 한 사람밖에 없는 집에서도 징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4] 12위 6솔부

12위 6솔부는 수도경비의 임무를 맡은 부대입니다. 12위는 좌위, 우위, 좌효위 • 우효위, 좌무위 • 우무위, 좌영군위 • 우영군위, 좌금오위 • 우금오위로 이루어지고 대장군(정3품)과 장군(종3품: 2명)이 지휘했습니다. 솔부는 태자를 경비하는 6개의 군단입니다. 이들 12위 6솔부는 각 위마다 지방의 절충부 약 50개씩을 두고 그곳에서 병력원을 공급 받았습니다.

 

[5] 절충부(折衝府)

636년(정관 10) 지방에 설치된 병부 소관의 부서입니다. 병력의 공급원이자 지방 치안의 중심이 됩니다. 지방행정구역인 주현과는 통속관계에 있지 않으며, 소재지 이름을 앞에 붙여 팽지부(彭池府) 등으로 불렸습니다. 절충부의 수는 전국에 걸쳐 약 600개 정도였습니다. 그 중 약 400곳은 장안 및 낙양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수도 및 그 연변의 경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절충부의 배치는 방금 설명한 것처럼 전국적으로 균일하게 배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경조부(京兆府)를 포함하는 관내도(關內道)와 낙양 중심의 하남부를 포함하는 하남도(河南道) 그리고 태원을 포함하는 하동도(河東道)에 절충부가 집중배치되어 전체 절충부의 80%가 관내도 • 하남도 • 하동도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80% 내에서 무려 44%의 절충부를 차지하는 관내도의 경조부에는 20%에 해당하는 131개의 절충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양자강 이남의 강남도와 영남도에는 전체 절충부의 겨우 17%만이 배치되었습니다.

 

각 절충부의 병원 수는 대개 1천여 명 전후였습니다.

 

절충부의 주요 지휘관은 이러했습니다.

 

① 장관 : 절충도위(折衝都尉 : 정4품상~정5품상)

② 차관 : 과의도위(果毅都尉 : 정6품상~종6품하) 2명

③ 교위(校尉) : 200명의 병력을 지휘

④ 여수(旅帥) : 100명의 병력을 지휘 

⑤ 대정(隊正) : 50명의 병력을 지휘 

⑥ 화장(火長) : 10명의 병력을 지휘

⑦ 기타 : 장사(長史) 1명, 병조(兵曺) 1명, 별장(別將) 1명

 

[6] 구밀복검으로 유명한 당 현종 때의 재상 이림보는 절도사 등 무인 등용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는 변경의 이민족 출신이나 한미한 가문의 자들을 을 무장들을 과감하게 무인으로 등용하였습니다. 이림보는 「문인이 장군이 되면 화살과 돌에 맞는 것을 겁내므로, 한미한 가문 출신자나 번인(오랑캐)을 기용하는 것이 좋다. 번인은 전투를 잘하고 게다가 용기가 있다. 또 한미한 가문의 출신자는 당파가 없다.」라고 말하며 이들의 등용을 강력하게 주도해나갔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 세미나 수당오대, 천하의 중심 고구려, 엔하위키 미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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