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나를 설레게 했던 사진 한 장과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사진 속 사내와 두 분 저자로 제가 흠모하는 분의 원형입니다.
‘내게 없는 것 모두는 나의 신이다’ 라는
니이체의 질투어린 말이 절로 떠오르게 하는 소중한 이들이지요.
1
먼저 광개토태왕릉비 옆에서 찍은 사내의 사진입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배짱이 엿보이는 허리춤, 그리고 발아래 차가운 눈도 녹일 듯 강한 눈빛을 보세요. 만주 하늘을 홀로 떠받치고 있는 듯 한 저 광개토태왕비와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마치 ‘이게 우리 민족의 기상이야’ 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 눈에 봐도 진한 애국의 결기가 넘치는 모습입니다.
릉비의 비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찍은 것이 틀림없는데, 그가 고관대작이 아니어서 더욱 감동을 안겨줍니다. 그 때쯤 조선 땅에서는 이름깨나 있는 작자들 거의가 나라 팔아먹기를 무슨 유행처럼 여기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보통 결심이 아니고서는 그런 세태를 뚫고, 저기 저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서지 못했을 터인데, 조선 백성모습 그대로 이 비석과 어우러진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비유하자면 광개토태왕의 호위 전사가 환생한 것 같기도 한데, 약간 서러움까지 안고 선 듯한 사내의 모습이 민족을 거의 잊고 사는 우리들의 심장을 한 대 쥐어박는 느낌이었답니다. 어디에 있었던 사진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사진 속 이 사내가 몸으로 애국애족심을 보여주었다면,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 선생과, 고조선 연구에 큰 업적을 이룬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선생은, 치열하고 정련된 정신으로 한겨레의 찬란한 영혼을 보여준 분들입니다. 이 두 분 역사학자가 남긴 저술의 방대함도 그렇지만, 역사를 보는 안목과 통찰의 호방함이 저 사진 속 사내의 당당한 모습과 일맥상통하거든요.
자기 주변 거의가 사대주의 사관에 찌들어 있을 때,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세운 신채호 선생의 민족사관도 그렇고, 중국 중화주의의 본산인 북경대학의 한 복판에서, 사마천 사기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며, 대륙 고조선을 밝혀 낸 리지린 선생 역시, 광개토태왕릉비 같은 기개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 근처를 맴도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제가 아무르자주담론을 쓰면서 꽉 막혀 있을 때, 돌파구를 찾게 해준 것 역시 여기 두 분과 저 사진 속 이름 모를 사내였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재발견과 광개토태왕릉비 앞에서 느꼈던 새로운 감동과 해석, 그리고 때마침 리지린 선생의 고조선 연구를 책으로 퍼내 보내주신 도서출판 말의 대표인 최진섭 작가님의 호의로, 저는 우리 상고시대의 찬란한 한문명을 자신있게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리지린 선생이 밝힌 대륙 고조선은, 우축 상단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삼한 이전에 만주를 포함한 우리 한반도에 부족국가연합의 제국형 국가가 있었음을 비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북경대학의 방대한 문헌을 일일이 비교해가며, 엄격하고 품격 있게 대륙고조선을 밝힌 리선생의 연구결과와, 한자의 어원으로 추적해서 내린 제 결론이 정확하게 합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남한과 북한, 리선생과 나 사이에 가로 놓인 시공을 뛰어넘어 그의 손을 마주 잡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두 권의 책과 사진 속 사내가 내게 보태준 자신감과 통찰로, 광개토태왕릉비를 바라봤을 때의 감격을 공유하려 하려 합니다. 좀 길지만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계속 읽으셔도 시간이 아깝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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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가 운 좋게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자,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하는 질문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꽉 채웠던 모든 구상이 뼈대를 잃고 허물어졌다. 주변국 상황 가운데 하나인 ‘미제타도’ 가 어떻게 새 시대를 여는 담론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설혹 전술적 차원에서 꼭 거쳐야 할 경로라 해도 그것은 젊은 날 우리를 유혹하던 사대주의의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외부의 조건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주역량 재고를 기반으로 하는 자주담론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이제 답은 하나였다. 이대로 40년 묵은 숙제를 포기하거나 참으로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거나.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가운데 구세주처럼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게 있었다. 바로 고구려 고토에 지금도 웅후한 자태로 서 있는 광개토태왕릉비였다. 물론 광개토태왕릉비와 비문을 접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대학생 때 단재사상연구를 하면서 비록 번역본지만 몇 번씩 탐독을 끝낸 경험이 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로 인해 고구려의 강역이 정해지고 비문 하나의 해석 때문에 여전히 한 • 중 • 일 역사학자들이 수십 명씩 모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제 식상할만한 유물이었다. 그러나 그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비문의 내용이 아니었다. 바로 비석碑石 그 자체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광개토태왕릉비는 동양 최대의 비석이다. 높이는 6.39m에 너비가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인 자연석으로 무게만 37t에 이른다. 그리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이 3.35×2.7m에 달하며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다. 누가 보아도 처음엔 눈길을 빼앗을 만큼 육중하고 웅후한 모습이다. 필자 역시 처음 광개토태왕릉비 앞에 섰을 때 그런 감흥에 빠져 한참을 둘러 본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분명히 달랐다. 눈동자가 확 커진 듯도 싶었으며 어떤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듯 낮은 한숨이 터지기도 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단순히 비문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마치 푸른 하늘 전체를 바치고 서서 900년 고구려 역사를 증언하는 것처럼 고고하게 보였고, 그 비가 품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막 열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필자는 비로소 어떤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것은 단순히 감상에 휩싸여 순간적으로 그 공간에 잠긴 느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내 안에서 영속하며 시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커온 어떤 에너지가 일곱 번째 만나는 광개토태왕릉비 위에 자신을 응축시켜 하나의 이미지 언어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건 바로 그 당시 살았던 고구려인의 광대한 우주관이었다. 자기들이 가장 존경하던 호태왕의 공적을 기록하면서 인공으로 다듬은 비석 대신 거대한 자연석을 찾아 세운 그들의 자주적 세계관이 한 눈에 읽혔다. 세상에 어떤 인공적 유물이 자연의 웅대함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고구려인들은 그렇게 우주 그대로의 모습인 자연석에 자신들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훨씬 더 우주의 기운을 받을 것이며, 마침내 전일성의 우주와 합일하여 영원히 영속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그런 전무후무한 비석을 세웠을 것이리라. 그야말로 우리겨레 심장 깊숙한 곳에 담긴 자주정신의 총화였다.
사실 광개토태왕릉비를 처음 보았을 때 감동의 한편에는 무척 낯설음이 있었다. 비면을 잘 갈고 닦아 정리한 뒤 글자를 새기고 용문龍紋이나 운문雲紋등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해놓은 중국의 비문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긴 하지만, 어딘지 투박해 보이고, 돌을 다루는 기술조차 중국에 뒤진 게 아닌가, 하는 열패감이 뒷등을 타고 올라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중국 유물을 일단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비교하는 사대주의적 관성일 뿐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장군총 기단석이 얼마나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던가. 중국의 비석 같은 건 수천 개를 만들어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석공 기술을 보여준다.
여기에 비문의 서체 또한 새삼 눈길을 끌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의 글씨체는 언뜻 순박하고 투박해 보인다. 당대 중국에는 팔분체라는 예서체가 유행했는데 그런 서체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기교를 가하지 않아 조금 우직해 보이는 글자 그대로의 글씨체였다. 마치 추사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봉은사의 판전 현판 글씨 같았다. 죽기 바로 직전 모든 기량을 담았으나 처음 글씨를 배운 어린아이 글씨 같은 순진무구함과 더 없는 완숙함이 느껴지는 글씨체 말이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서체가 바로 그랬다. 그래서 언뜻 촌스러움이 느껴지기에 이 또한 고구려의 수준이 낮은 것처럼 보였는데, 앞서 말한 그 순간부터 달리 보였다. 비문을 쓰기 위해 사각으로 줄을 치고 지금까지 판독할 수 있을 만큼 깊이 판 글씨새김으로 볼 때 당대 유행서체를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임에도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은 바로 그 의도가 비로소 보였다. 그냥 무심한 상태에서 막대기로 그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고졸한 비문의 분위기가 당시 기교를 많이 부리던 중국서체 이상의 품격을 가득 담고 있었다. 중국 한자의 할아버지 격인 갑골문의 글자처럼 글자 초기의 순수한 기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자신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주위에 어린 자연의 힘을 응축시켜 모으는 최고의 기량이 흘러 넘쳤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광개토태왕릉 비문의 서체는 우주의 기운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장중한 자연석 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서체였다.
필자는 이를 통해 고구려인의 세계관과 당대 중국인이 가졌을 세계관의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중국인이 돌을 다듬고 화려하게 꾸며낸 인간사에 머물러 있는 대신 고구려인은 그를 포함하는 더 넓고 높은 우주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끌고 왔음이 분명했다. 충분히 돌을 다듬을 수 있는 기술력이 있음에도 장엄한 자연석 바위를 찾아 자신을 우뚝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로 그런 우주관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이전과 같은 비석 앞에서 기록 너머의 기록을 비로소 보게 되는 그 순간 역사를 보는 어떤 혜안이 열린 것이었다.
동시에 그렇게 열린 혜안은 단지 역사 해석의 전환에 그치지 않았다. 담론쓰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졌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담론이란 수많은 정보의 축적에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비석이 달리 보이듯 관점의 대 전환이 일어나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관념에 머물러 있던 담론쓰기가 이제 실천을 담보할 수 있는 몸의 언어를 보충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 것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미친 듯이 자주담론을 파고들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지식과 정보를 바닥부터 모두 재구성했다. 관련된 문헌기록을 읽을 땐 기록의 진의뿐 아니라, 그 기록이 감추고자 한 기록 너머의 기록을 반드시 재구성해서 그 진의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앞서 기술한 하늘의 기억과 땅의 눈물, 그리고 몸의 언어였다.
그러자 자주담론을 자신 있게 말할 힘이 생겼다. 그동안 외세와 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민족을 옭아매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불의한 기득권 유지를 위한 서구문명우위론, 아제국론, 천재영웅론, 자유만 선의론, 그리고 여전히 분주한 검은 혀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 담론을 무조건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이긴다 해도 그들의 프레임 안에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반절의 승리밖엔 구할 수 없다. 그들의 논리나 명분보다 더 낫고 실제적인 새로운 가치를 내세워 극복하는 방법이야말로 최선이었다. 반미가 아니라 극미였다. 배중이 아니라 용화用華였다.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지만 우리 안에 이미 이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담론의 마지막 장인 빛의 나라로 우리를 안내할 소중한 새문명의 지도이다.
<아무르 자주담론> 광개토태왕릉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