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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명의 요동공략
게시물ID : history_150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
조회수 : 104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3/27 14:30:27

1371년 2월 유익이 남경에 사신을 보내 요동주군의 지도와 서적을 투항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명의 요동지배에 매우 중요한 전기였습니다. 명은 유익의 투항을 계기로 요동반도 남부에 정요동위(征遙東衛)를 설치하였고, 다음해인 1372년 9월 무렵에는 요양의 고가노가 마운(馬云) 휘하의 명군에게 투항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명의 관할 아래 넘어갔습니다. 이후 정요동위는 요동도지휘사사(遙東都指揮使司), 요동도사(遙東都司) 체제로 전환되었고 요동의 각 지역에는 명나라의 군기지인 다수의 위소(衛所)[1]가 설치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요동 지역에 대한 명의 지배는 이 때를 기점으로 확고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 더 간단히 말하자면 명의 지배는 일종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1387년 요동 지배의 마지막 걸림돌인 나하추가 항복을 하고, 포어하이(포어해)와 부르누 누이에서 있었던 북원군의 대패를 통해 명은 요동뿐만 아니라 요서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게 됩니다[2].



[1] 위소(衛所) : 위소는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합친 것으로 병농일치의 군사제도였습니다. 홍무제 즉위 초 모신 유기의 건의의 따라 무덕(武德) 이하 17위 친군지휘사사((親軍指揮使司)를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1374년경에 제도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군대편성의 최소단위는 100호소(百戶所)로 총기(總旗) 2명, 소기(小旗) 10명, 병사 100명으로 이루어지며, 소기는 병사 10명을 거느렸습니다. 100호소의 위는 1,000호소(10개의 100호소로 이룸)이며 5,000호소로 1위를 편성하여, 1개 위의 총인원수는 5,600명이었다.


위의 장관을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都司)라 하였으며, 중앙의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수는 1393년에 도사(都司) 17명, 내위(內衛)·외위 329명에 이르렀으나, 시대에 따라 차이가 심하였습니다. 병사는 세습적 신분인 군호(軍戶) 출신자로 충당되어 경사(京師:수도)·변경 방위를 맡았는데, 위소에 딸린 군둔전(軍屯田)을 경작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중기 이후 흩어져 말기에는 무력해졌습니다.


[2] 당초 명나라는 육로가 아닌 산동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요동으로 진출하였기 때문에 요서에 대한 기반은 미약한 편이었는데, 포어하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요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 출처 : 네이버 역사 카페 부흥 타브가치님의 글 일부 발췌,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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