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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미 요동 땅에 고려인들이 상주하여 활동하였다.
게시물ID : history_150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버나이특
추천 : 5/10
조회수 : 9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3/26 18:56:30
연구책임자: 위은숙
연구기관: 영남대학교
연구분야: 고려시대사
연구과제명: 13~14세기 고려와 요동지역의 경제적 교류
 
원간섭기 요동의 고려인 분포규모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여 30여년간 항쟁할 즈음 가장 피해가 컸던 북계의 고려군민들은 상당수가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 요동의 요, 심, 서간도 지역에 억류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그 지역에 거주하였다. 또한1231년 홍복원의 반역에서 1270년 최탄의 모반까지 북계(서북면)의 대소토호들은 고려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때 몽고에 투항하면서 자기 관하 고려민호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이 요동지역의 고려민호의 주를 이룬다.
 
원에서는 1234년 홍복원에게 이렇게 흘러들어온 요양, 심양 거주 고려항민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심양로는 바로 고려의 항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북계가 1270년 동녕부가 설치되어 원의 요양행성 관할하에 있었던 것은 20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1290년 동녕부가 폐지되어 다시 고려로 들어가자 반기를 든 대다수의 북계지역 토호들은 또 다시 그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요, 심 지역으로 옮겨 들어갔다. 그들은 당시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심양로로 들어가지 않고 동녕로를 개설하여 독자적으로 존속하면서 요양행성의 7로의 하나로 되었다. 이렇듯 점진적으로 요동에 흘러들어간 고려민호는 충렬왕대에 이미 3만명을 상회하였다 한다.(3만 2천 ~ 3만 3천).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본국인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요동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공민왕 때, 1차 요동정벌을 하면서 2,300여호를 귀환시켰으나 본국에 귀환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몽고에서는 심양로와 동녕로의 고려군민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심(양)왕 아래에 둔 것 같으나, 그를 이용하여 오히려 고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몽고에서는 심양로와 동녕로의 고려군민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심(양)왕 아래에 둔 것 같으나, 그를 이용하여 오히려 고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들을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음으로서 고려와의 경제적 교류는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원의 재정권에 포함된다고 간주하고 특히 요동과 고려를 근접한 재정권역으로 파악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원은 북계와 동계지역에 동녕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요, 심 지역은 심(양)왕과 홍복원 일가 등 토호세력을 이용하여 고려와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분리하고자 하였지만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근접재정권으로 묶어 운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고려와 요동의 교역 충선왕이 요동지역에 가지고 있었던 경제적 기반으로는 懿州(의주)의 典庫(전고) 店鋪(점포), 營城(영성)과 宣城(선성)의 掃里(소리) 등이었다. 이들 기반은 이후 고려왕에게 상속되었다. 그 중 의주의 해전고점포는 국왕의 어용을 위해 고려 본국에 설치된 창고기관인 해전고의 출장기관으로 충선왕이 본국으로부터 오는 대량의 포를 전매하여 원 체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의주에 설치한 것이다.
 
의주는 요양행성관할 요양로에 속한 1영현 2주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의주의 해전고점포는 고려의 물자가 공식적으로 또한 가장 많은 량이 요동에서 거래되는 창구였다. 원 간섭기 고려국왕들은 한결같이 왕실재정 확보를 위해 무역을 하였으며, 지배층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고려 상인들이 5-10인씩 무리를 지어 요양과 심양 등지로 무역하는 상인들이 끊이지가 않았다는 사료는 소규모 상인들의 교역도 당연히 활발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에서 원도로 들어가는 육로교통로에 요동이 위치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특히 원 간섭기의 무역상인을 주인공으로 한 漢語(한어)교본인 老乞大(노걸대)에서는 주인공이 고려의 개경에서 요동을 거쳐 원의 수도인 大都(대도)까지 가서 무역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과 동행하는 중국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요양성에 살고 있던 상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려 상인이 요동을 거쳐 북경까지 무역을 하는 것도 대단히 일반적이고, 요동상인의 고려출입 등도 대단히 자유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원 간섭기 이전에도 북계 지역은 북방민족과 무역이 활발하였다. 따라서 동녕부가 설치된 후 그 지역의 토호들이 주가 되어 무역에 적극 나섰을 가능성이 있으나 동녕부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전히 요동과의 무역은 크게 어려움없이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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