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20일,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1차 총파업
총파업 “의사임을 포기해야 합니다. 병·의원 폐업으론 안 됩니다. 의사면허 소지자가 0명이 되어야 합니다. 환자들, 죽어나가는 것 봐야 합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온갖 비난 받아낼 각오가 돼 있어야 합니다.”
“별로 시덥잖은 직업이 되어버린 의사가 하기 싫어서 그만두겠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의사말고도 대한민국에는 많은 의료인이 있습니다. 한의사들도 있고, 약사도 있고…. 응급환자 생기면 그분들에게 가시지요.”
2000년 의약분업 시행 전 한 PC통신에 있는 대한의사협회의 비공개 대화방(CUG)에 ‘올려진’ 의사들의 글이다.
우리나라는 1963년 약사법 개정으로 의약분업의 원칙을 확인하였으나 부칙에서 의사의 직접조제를 허용하여 그 시행을 유보해 오던 중, 1993년부터 3년간 지속된 한약분쟁을 계기로 1994년 약사법을 개정하여 의약분업의 시행을 명문화 하였다.
개정 약사법에는 '1999년 7월7일 이전에 의약분업을 실시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1998년 의약분업추진협의회를 구성했다.
의료계와 약계의 요청으로 1년간 시행을 연기한 끝에 1999년 12월7일에야 개정 약사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2000년 7월 1일 의약분업을 전격 시행하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2000년 이전에는 병의원에서도 투약을 받고 약국에서도 진료를 받는 등 의사와 약사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러한 무질서는 의사와 약사는 물론이고 당시를 살아가던 대다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환자들은 비용만 지불할 수 있다면, 간단한 감기약부터 항암제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원하는 약을 병원, 의약, 약국 어디서든 처방받거나 구입할 수 있었다.
1997년 의료보험 통계를 보면 의원은 2억 9천만건, 약국은 1억 9천만건 이상을 청구하고 있었는데, 전문의약품 판매를 제외한 약국의 공식적인 청구분이 전체 청구의 2/5를 차지하였다는 점은 의약사간 직능 갈등이 매우 심각하게 내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의약품의 오남용이 심각한 수준으로 이로 인한 국민 건강의 훼손이 매우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나라의 항생제 내성률은 70~77% 수준으로 캐나다, 미국, 영국 등에 비해 6~10배 높았다.
또한 처방전이 공개되지 않아 환자들은 자기가 어떤 약을 복용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고, 게다가 항암제를 포함한 모든 의약품을 언제든지 구입해서 복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약품의 중복 복용, 오용과 남용, 이로 인한 건강의 손실을 매우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의약품 유통 부조리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병의원과 약국은 제약회사나 도매상에게 의약품을 공급받을 때 정부 고시가(보험약가)보다 50% 이상을 할인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랜딩비·리베이트비 등 제약회사에게 의약품 처방 대가를 받는 일도 만연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대행 청구 등 부당 청구의 만연, 불투명한 병의원 경영상태, 저급한 의약품 품질, 영세한 제약회사와 도매상 난립에 따른 의약품 유통의 혼란 등 다양한 문제들이 때 마다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많았다.
즉 의약분업은 작은 의미에서는 의사와 약사의 제자리 찾기이지만 좀더 크게 본다면 단지 의사(의료기관)와 약사(약국)의 역할분리를 통한 오남용 억제라는 차원을 넘어 제약회사 구조조정, 유통 현대화 및 투명화, 의약품 품질 향상, 수가 정상화 및 병의원 경영투명화라는 다양한 의료개혁 과제들이 포함되어 만들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특히 의사들의 반발은 거세었다.
1999년 11월 30일 장충체육관대회, 2000년 2월 17일 여의도 대회에 이어 4월 4∼6일 동네의원 중심의 의료계 100년 역사상 첫 휴진투쟁이 촉발됐다.
6월 4일 '잘못된 의약분업 저지를 위한 전국 의사투쟁 결의대회'를 통해 세를 결집한 의료계는 전국회원 98.9%가 정부안을 거부하고 무기한 폐업에 동의함에 따라 6월 20∼26일까지 전면폐업 투쟁을 펼치기도 하였다
분쟁 당시 대한의사협회는 의약분업과 관련해 정부에 대해 10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의약품 재분류 △지역 의보재정 50% 국고지원 △약사법 재개정 △약화사고 책임소재 명문화 △약사의 임의조제 근절 △복지부장관과 정책입안자 문책 △시범사업 실시 △처방료·조제료 현실화 △수가계약제와 심사평가원 독립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등이다.
특히 의사들은 의약분업을 하려면 의약품을 선진국 수준으로 다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약품은 크게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전문의약품과 소화제처럼 의사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맘대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으로 나뉜다.
의사들은 일반의약품 수를 줄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들은 또 의사의 진료권을 침해하는 약사의 임의조제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낱개로 포장된 약을 팔아서는 절대 안 되며, 의사의 사전동의 없는 대체조제를 인정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의사협회는 6월 19일 ‘폐업에 임하는 의협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내 “의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잊혀졌던 환자와 의사의 인권회복 투쟁에 들어가고자 한다”면서 기존의 10개 요구사항을 거듭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한마디로 “집단이기주의”이라고 일축했다.
이와 관련 시민단체들의 연합체인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시민운동본부’는 19일 보건의료계, 학계 등 500인 인사 명의로 ‘의료계 폐업철회와 의료개혁’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서 각계 인사들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맡고 있는 개원의, 의대 교수, 전공의 너나할 것없이 의사회의 요구사항이 폐업을 하거나 업무정지를 하겠다는 것은 설사 그 요구가 정당하더라도 국민은 이기주의적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특히 “현 의약분업 안에서도 의사들의 주장하고 있는 임의조제 대책이나 의약품 분류 등은 대부분 수용됐다”면서 “의사회는 폐업계획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결국 2000년 6월 20일 전국 대부분의 병원과 의원들이 문을 닫고 집단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병원 3곳을 전전하던 70대 노인이 숨지는 등 의료사고도 잇따랐다.
이날 전국 대부분의 동네의원이 문을 닫은 가운데 문을 연 종합병원에는 환자들이 평일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어 한산한 모습을 보였으며, 대신 보건소에 환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의과대학 교수들도 6월 23일 사표를 제출하고 응급실에서 철수하자 일부 병원에서는 분노가 한계에 달한 환자 가족들이 의사를 폭행하는 등 공황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의사협회가 6월 24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7월 약사법을 재개정하기로 했다는 합의사항을 수용하고, 6월 25일 폐업철회 여부를 묻는 찬반투표를 벌인 결과 철회 의견이 51.9%를 넘자 의사들은 6월 26일부터 진료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후 전공의는 물론 의대생들도 가세했다.
7월 29일 전공의들이 전면 파업을 시작으로 8월 11∼17일 의료계 재파업이 이어졌다.
9월 5∼21일 의과대학 교수들이 외래진료에서 철수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10월 6∼10일 의료계의 5차 파업이 벌어지는 등 2000년 내내 집회와 휴폐업 투쟁이 계속됐다.
2000년 11월 11일에야 의사-약사-정부가 밤샘 협상 끝에 약사법 개정안을 타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협상안은 대체조제의 경우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생동성시험을 거친 약품은 예외로 인정하고, 명확한 사유가 있을시에만 대체조제 불가표시를 하기로 했다.
논란이 되었던 의약품 분류는 현행대로 하되, 이론이 있을 경우는 조속히 재분류하기로 하고 포장단위는 소포장단위가 안되도록 정부가 지도하기로 결론지었다.
또 의약협력위원회 규정을 삭제하고 처방의약품 선정은 의약계 자율에 맡겨 최소화하도록 했다.
의사협회 지도부, 병원협회, 의대교수협의회는 처음부터 합의안을 수용한 데 반해 의쟁투, 병원의사협의회, 전문과 개원의협의회는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곧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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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병원 파업으로 장애아가 된 박군 가족이 경북 포항의 S병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05년 8월에 병원 측은 이들 가족에게 5억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사건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2000년 10월8일 당시 생후 2년 7개월이던 박군은 새벽부터 여러 차례 토하기 시작해 같은 날 정오 무렵 S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당시 응급실은 전국적인 병원파업으로 단 한 명의 소아과 전문의만 근무하고 있는 상황.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해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사이 박군은 계속 토하고 입술에 청색증이 나타나는 등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오후 5시경 전문의는 X레이 판독 결과 장폐쇄(막힌 장의 부위에 혈액순환이 차단되거나 저해되어 장의 괴사가 일어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지만 의료진이 없어 박군을 치료하지 못했다.
결국 박군은 S병원 응급실에 머문 6시간 동안 별다른 응급치료를 받지 못한 채 오후 6시경 2시간 거리인 K병원으로 옮겨졌다.
기가 막힌 일은 K병원에서도 일어났다. K병원의 의사는 S병원의 장폐쇄 진단을 무시하고 뇌 질환을 의심해 박군의 머리를 CT 촬영한 것.
그러는 사이 박군은 하루를 넘긴 새벽 1시경 경련 발작을 일으켰고 맥박이 뛰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이 확인된 후에야 K병원 의료진은 복부 CT 촬영을 실시했고 오후 4시 복막염과 감돈성 장폐쇄로 결론 내리고 개복수술에 돌입했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구토를 시작해 병원을 찾은 지 28시간 만에, S병원 전문의의 장폐쇄 소견이 나온 지 23시간 만에 이뤄진 때늦은 수술이었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박군은 지체된 수술로 인해 큰 후유증을 겪고 있다. 심장이 일시 정지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여러 증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박군은 수술 후 의식이 흐려지고 간헐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다 신체 오른쪽 마비와 간질, 언어장애, 정신지체 등의 증세를 보여 2001년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대학강사였던 박군의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박군을 돌보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2005년 현재 일곱살인 박군은 후유증으로 인해 3∼4세 수준의 인지행동능력을 보이고 있는데, 세 살 터울인 동생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일 때 부모로서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박군 측 변호인인 홍영균 변호사는 “당시 S병원 응급실에서 혼자 근무한 전문의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파업만 아니었다면 응급 개복수술을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박군이 이 같은 후유증을 갖게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아무리 파업 중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응급실에는 대체 의료진을 갖춰놓아야 한다는 것을 종합병원들이 인식, 대응자세가 바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