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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가 죽었다. 시골 옆집에 살던,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가.
일주일 전이었다. 올해 12살이 된 난 사춘기를 겪기도 전에 크나큰 시련에 직면했다. 용어의 뜻은 잘 몰랐지만 부모의 이혼조정기간. 아마 부모가 헤어진다는, 좀 더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이혼을 한다는 것이 맞으리라.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복싱 시합에서 잽이 수차례 오고가는 것을 보면 누적 데미지가 상당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 부모도 잽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커다란 훅을 날린 것 같았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전쟁 같은 부부 싸움이 있던 날이었다.
그날 거실에 쪼그려 앉아 안방에서 들려오는 고성을 들었다. 분명 결정적인 다툼의 이유를 들은 것 같았지만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귀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도시에서 시골로 떨어져 내려왔다. 아빠는 할배에게 나를 떡하니 맡겨놓고는 집밖으로 나갔다. 화가 난 할배는 마당 밖을 나서는 아빠에게 유리컵을 던졌다. 컵은 아빠를 맞히지 못하고 땅바닥에 부딪치며 깨져버렸다.
“이를 우짜면 좋노. 깨진 건 붙지도, 붙어서도 안 되는데.”
할배는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이 이혼을 한다는 것이 기가 찼으리라.
시골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홀아비로 지내는 할배의 요리는 들쑥날쑥 했고 컴퓨터, 아니 스마트폰도 없었다. 세상에 고립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어린 나이에 쓰디쓴 경험을 하게 됐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할배가 밭일을 하러 나간 사이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할배의 은밀한 취향이랄까? 곳곳에 알 수 없는 촛대와 눈을 시퍼렇게 부릅뜬 달마도, 잘 손질된 단검이 비치돼 있었다. 책상에는 읽다만 경전 같은 책이 펼쳐져 있었는데 온통 한자인지라 읽는 것은 포기했다. 서재를 나오려던 내 눈에 벽에 걸린 연이 들어왔다. 스마트폰으로 했던 게임을 떠올리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시골길을 걸었다. 포장이 안 된 투박한 흙길을 걸으며 하늘 아래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여름이었다. 푸르른 초목과 고추잠자리 따위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거기다 따가운 햇살과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피로감을 안겨다줬다.
집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돌리던 순간 퍽, 하고 무언가와 부딪히며 자빠졌다. 아이씨, 라는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자 나와 비슷한 덩치의 남자 아이가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미안한 눈빛을 보내자 녀석은 환하게 웃어보였다.
“괜찮냐? 인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돌아서면 어떡하냐? 하하.”
“미안, 뒤에 있는 줄 몰라가지고.”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은 우린 서로 동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동산 중턱에 올라가 나란히 앉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경배라는 아이는 시골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느라 연신 침을 튀기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선배인양 떠들어대는 모습에 우습기도 했지만 귀에다 우겨넣고 있었다.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부모가 헤어진 사실과 할배의 요리 솜씨에 대해서도 품평을 늘어놓았다.
“뭐? 할아버지가 요리를? 너도 참 딱하다.”
“계란 후라이에 파리가 있으면..... 너라면 먹을 수 있겠어? 엄마 밥이 그립다. 특히 불고기가.”
절로 엄마 밥이 그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할배가 아무리 세심하게 보살펴준다고 해도 엄마 손길에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니까. 왈칵, 하고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려던 그때 경배가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엄마, 아빠가 헤어졌었는데..... 다시 만났어.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아?”
귓가가 쫑긋 세워졌다. 머뭇거리는 경배가 재차 말을 이어가길 바랐다. 똑딱똑딱, 시계 소리인지 심장소리인지 모를 박자가 귓가에 울릴 때 큰 외침이 끼어들었다.
“경배야! 밥 먹으러 와!”
경배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냅다 달려갔다. 고개를 들어 내려다보니 어느 아저씨와 아줌마가 손을 흔들고 서있었다. 경배의 부모일 것이다. 헤어졌다가 만난, 내가 꿈꾸던 이상향의 부모 말이다.
밤새 뒤척이며 경배의 말을 떠올렸다. ‘다시 만났어.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아?’ 그 말이 머릿속에서 한여름의 모기처럼 맴돌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배는 푸웅, 하고 힘 빠진 방귀 소리를 냈다. 난 할배와 덮던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고는 돌아누웠다.
동이 트자마자 할배가 차려준 밥을 대충 먹고는 시골길을 걸었다. 경배를 다시 만나야했다. 마을을 몇 시간이나 헤맸지만 경배는 보이지 않았다. 집이 어딘지 물어나 둘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다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너머 작은 연이 둥둥 떠있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연이 띄어진 곳을 찾아 나섰다. 몇 군데나 되는 논밭을 넘고 으슥한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 경배가 있었다. 그는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연을 띄우고 있었다.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방긋 웃던 경배는 옆으로 비껴 앉아 자리를 내주었다.
털썩하고 경배 옆에 앉았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알아?”
“그게 뭔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건데, 내 소원은 찢어진 엄마, 아빠가 다시 같이 사는 것이었어.”
경배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내 시선이 대나무 숲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자리에 멈췄다. 돌이 옹기종기 모여 탑을 쌓고 있었다. 이를테면 돌탑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하나씩 정성을 들여 쌓아둔 것 같았다. 누군가가 경배일까?
“난 저곳에다 돌을 쌓으며 매일 소원을 빌었어.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난지 알아?”
“무슨.....?”
“산신이 나타났어.”
경배는 산신을 만나 소원을 말하고 꿈에 그리던 부모와 함께 살게 됐다. 비록 그들이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가 있더라도 경배는 함께 하고 싶었다. 나 또한 경배의 소원처럼 부모가 다시 재결합하길 바랐다.
주저하지 않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다 돌탑에다 올렸다. 합장을 하고 소원도 빌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경배를 쳐다봤다.
“집에 혹시 연 있어? 그걸 여기서 날려야 돼. 그래야 산신이 소원을 들어주실 거야.”
오늘 저녁 메뉴는 밥과 파전이 끝이었다. 이유인즉 할배가 막걸리를 한잔 걸쳐야 돼서 반찬이 파전밖에 없었다. 꿀꺽거리며 막걸리를 들이키는 할배의 입에서 발효된 쌀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난 억지로 파전을 장에 찍어 먹으며 배를 채워댔다. 엄마가 해준 불고기가 그리웠다.
“할배, 아빠랑 엄마는 왜 헤어진 거야?”
할배는 꺼억, 하는 트림 소리만 낼뿐 재차 막걸리를 들이켰다. 대답해주기 싫은 모양새였다.
“할배, 이 뒷산에 대나무숲 알지? 거기서 연을 띄우면......”
“그 소리 어디서 들었냐?”
고주망태가 돼서 눈이 풀렸던 할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는 대충 얼버무렸다. 경배 얘기는 쏙 뺀 채로. 할배는 마시던 막걸리를 치우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용히 할배의 서재에 걸려있던 연을 떠올렸다.
벽에 걸린 시계가 아침 7시를 가리켰다. 할배가 나간 틈을 이용해 서재로 들어갔다. 당장 필요한 물건이 있기에.
문을 열고 서재 벽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연이 없었다. 할배가 치워버린 모양이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입 밖으로 꺼내 소리를 질러버렸다.
동산에 앉아 멍하니 마을을 내려다봤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나무 그늘 아래 있으니 제법 시원했다. 경배는 내 스토커라도 되는 양 불쑥 나타나 옆에 풀썩하고 앉았다. 녀석은 내 표정을 보더니 말을 안 해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연이 없구나?”
“아니, 있었지. 할배가 치워버리는 바람에 없어졌지만.”
“실은...... 아빠한테 네 얘기하니까 연을 직접 만들어준다는데?”
경배의 손길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받게 됐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경배 집으로 들어갔다.
훅, 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거칠게 돌려 경배를 쳐다봤지만 그에겐 냄새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히 손가락으로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거실에서 딱풀 냄새가 가득 풍겨져 나왔다. 가만히 거실로 들어서니 경배 아빠가 좌정한 채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모난 종이에 대나무를 이어붙인 방패연이었다.
“네가 동진이구나?”
이름을 부르며 살갑게 대하는 경배 아빠에게 꾸벅 인사했다. 우리가 낸 인기척에 부엌에서 경배 엄마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딘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 끼어진 고무장갑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의 근원이 저것일까?
경배의 부모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던 가정이라고 들었지만, 부부의 눈은 반달처럼 생글거리고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부모의 손길에 함박웃음을 짓는 경배의 모습.
메스꺼움과 동시에 질투심이 생겼다.
“아저씨, 그럼 저 연을 제가 가져도 되는 거죠?”
“물론이지. 어서 가져가렴. 우리도 네가 연을 빨리 날렸으면 좋겠구나.”
어떻게 다시 재결합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꿀꺽 삼켜버리고는 바닥에 놓인 연을 집어 들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사리분별이 되지 않으면 연이 떴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고사리 같은 손에 연을 쥐고 대나무 숲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틈틈이 피부를 통해 바람이 불고 있는지 확인했다. 연을 띄우기엔 좋은 상태였다.
돌탑으로 다가가 돌 하나를 올리고 합장했다. 소원으로 엄마와 아빠가 다시 같이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경배 아빠가 설명해준 연 날리기 요령을 떠올리며 손에 쥔 연을 살며시 놓았다. 경배는 대나무 숲에 바람이 잘 분다며 뛸 필요가 없다고 조언해줬었다. 과연 그 말대로 연은 바람에 실려 공중으로 나풀나풀 떠올랐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사방이 캄캄해졌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동물소리에 깜짝깜짝 놀랐다. 이 상황에서 산신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 침착하게 소원을 빌어? 아님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을 쳐?
조바심이 일 무렵 캄캄해진 시야로 무언가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분간하긴 어려웠지만 짐승은 아닌 듯 했다. 쉬익, 쉬익, 뱀 같기고 하고 옷자락이 바닥을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내 주변을 느릿느릿하게 맴돌고 있었다.
이것이 정말 산신일까? 상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밝은 빛을 뿜어내는, 하얀 옷을 입은 천사 같은 노인을 예상했었다. 망설이던 머릿속에 경배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고 무언가에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산신이라면...... 제 소원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 사는 거예요.”
대답이 없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봤다. 그것은 걸음을 멈추더니 제자리에 굳은 듯 서있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날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어디선가 히히히,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연을 지탱하던 줄이 끊어지자 내 손이 홀가벼워졌다. 나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봤지만 곧장 그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없었다. 그것은 사라진 뒤였다. 달빛이 뒤늦게 대나무 숲을 밝혔다.
대나무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저 멀리 불빛이 보이는 마을로 뛰어 내려갔다. 대나무를 몇 십 개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낯익은 냄새가 훅 하고 다가왔다. 경배 집에서 맡았던 비릿한 그 냄새......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땀이 범벅이 된 몸을 이끌고 숲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흙길 위로 살랑거리는 여름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할배는 천둥 같은 코골이를 하며 나자빠져있었다. 간단히 냉수로 몸을 씻은 뒤 그의 옆에 누웠다. 괜한 짓을 한 것일까? 약간의 후회도 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것이 산신이든 아니든 소원을 말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뭐라도 한 것이 만족스러웠다.
서서히 의식이 침잠에 빠지며 아늑해졌다. 모든 생각이 멈춰지려던 그때였다. 비릿한 냄새가 또다시 코를 간질거렸다. 잠에서 깨어보려 애썼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대로 꿈이 없는 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환하고 눈을 아프게 하는 아침 햇볕이 내 눈덩이를 강타했다. 평소대로였으면 자동으로 눈을 떴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간밤에 잠들기 전에 맡았던 비릿한 냄새 때문이었다. 난 의식을 되찾자마자 후각에 신경을 집중해서 킁킁거렸다.
비릿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군침이 돌게 하는 불고기 향이 느껴졌다. 거기다 이 냄새는...... 엄마가 해주던 불고기였다.
눈을 번쩍 뜨자 이부자리에는 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앞치마를 둘러맨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던 여자가 뒤돌아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였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앉은뱅이 식탁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아빠도 보였다. 요 며칠 집에 안 들어온다더니......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가며 와락 껴안았다.
식사다운 식사를 마쳤다. 할 말은 많았지만 엄마의 불고기에 혀가 마비되어 질문도 잊은 채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다 넣기 바빴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접시가 뚝딱 비워져있었다.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마당으로 나갔다. 한가운데 놓인 마루위에 할배가 걸터 앉아있었다. 그는 곰방대를 피우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배 옆에 앉으니 땅이 꺼져라 한숨 소리가 뿜어져 나왔다.
“할배는 엄마랑 아빠가 같이 사는 게 싫은 거야?”
“이 녀석아. 너희 가족은 다시 뭉치면 안 되는 가족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할배는 피우던 곰방대를 내려놓고 날 뚫어져라 쳐다봤다. 시선이 다시 엄마와 아빠에게도 옮겨져 갔다. 그 눈빛은 자식과 며느리를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낯선 이방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할아버지가 잠깐 어디 좀 다녀오마. 헌데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잠시 뜸을 들이는 할배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할배였다. 주름진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내 귓가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네 애비와 어미가 이상한 행동을 하거들랑..... 안방 옆에 할배가 몰래 알려준 다락방 문 알지? 거기에 들어가 있거라. 문은 꼭 잠그고. 알았지?”
이 말을 남기고 할배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어슬렁어슬렁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마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집안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설거지 중이었다. 엄마에게 다가가려다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왜 이 냄새가 자꾸 나는 것일까? 안방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안방으로 들어가자 아빠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어딘가 가려운 듯 온 몸을 긁고 있었다.
“아빠, 왜 바닥을 뒹굴고 있어?”
아빠는 못 볼 걸 보여준 표정으로 흠칫 놀랬다.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며 자세를 고쳐 잡아 앉았다. 그 미소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일전에 경배네 부모가 짓던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집밖으로 나섰다.
경배 집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우리 집에 엄마와 아빠가 다시 같이 살게 됐다고. 흙길을 밟으며 걸어갈 때 풍경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보였다. 소중한 이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공기까지 바꾸는 모양인가 보다. 비릿한 냄새와 아빠의 이상 행동이 호주머니 속에 송곳같이 느껴질 때쯤 경배 집 앞으로 당도했다. 경배 이름을 크게 부르려다 그만 새소리를 내고 말았다.
비릿한 냄새가 아주 심하게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회색 빛깔의 경배네 집은 붉게 물든 것만 같았다. 그때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경배.....니?”
귀신, 아니 경배 아빠였다. 그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히죽거리며 서있었다. 눈은 흰자위만 가득했고 한손에 식칼이 들려있었다. 피가 뚝뚝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히히...... 동진이 왔니?”
뒷걸음질 치며 경배 아빠가 열어둔 문 안쪽을 힐끔 쳐다봤다. 경배 엄마가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문틈으로 핏기 없는 작은 손이 바닥에 놓여있었다. 부부의 만찬은...... 경배 아빠는 실성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동진이도 같이 먹을래?”
경배가 죽었다. 시골 옆집에 살던, 나와 비슷한 처지였던 친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줄행랑을 쳤다. 이 상황에 할배는 어디를 간 거람. 아니 지금 나에겐 엄마와 아빠가 있잖아? 그래, 이젠 부모가 함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흙길을 가로질러 집에 도착한 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창문 너머로 주변을 살피니 경배 아빠는 따라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자 엄마가 다가와 차가운 수건으로 머리를 식혀줬다. 아빠도 다가와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바래왔던 안전하고 단란한 가정. 심장 박동소리가 점차 안정될 무렵 또다시 나타난 비릿한 냄새가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경배 부모와 같은..... 나보다 키가 높은 엄마와 아빠를 올려다보니 그들의 눈과 입꼬리는 히죽거리고 있었다. 슬그머니 그들의 품에서 벗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철컥, 하고 문을 슬며시 잠갔다. 가만히 귀를 문가에 대고 집중했다.
“당신, 배고프지 않아?”
“아까 지나가던 똥개를 잡았는데도 승이 안차. 지금 해치울까?”
억, 하는 비명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할배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스르릉..... 스릉..... 부엌에서 나는 소리였다. 가시적이지 않더라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칼을 가는 소리였다. 그것도 만찬에 쓰일, 아마 나를 재물로 삼은 피비린내 나는 식사 말이다. 경배네 부모도 그렇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바짓가랑이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다락방, 할배가 알려준 다락방을 떠올렸다. 한쪽 벽에 드리워진 달마도를 들추자 나무로 된, 싯누런 부적이 붙여진 다락방 문이 나타났다.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살며시 열고 들어가 닫았다. 안에서 잠그는 걸쇠가 있어서 잠갔지만 어딘지 약해보이는 내구성을 보였다. 성인 남녀가 저걸 때린다면 얼마가지 않아 부서질 것이다.
다락방 계단을 살며시 오르자 쿵, 쿵 소리가 미약하게 울려 퍼졌다. 이 소리가 그들의 귀에 닿지 않길......
계단을 모두 오르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희미한 목재 향과 먼지 냄새. 천장은 낮았지만 벽에 작은 창문 하나가 나있었다.
창문 옆에 몸을 쪼그리고 앉아 바깥을 주시했다. 너른 마당이 보였다. 이곳에 당장 할배가 나타나주길 바랄 뿐이었다. 아직은 정정한 할배 말이다.
바람과는 달리 엄마와 아빠가 마당에 나타났다. 사이좋게 식칼을 하나씩 들고서.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가만히 관찰하며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엄마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가 바라본 방향은 다락방에 난 작은 창문이었다. 화들짝 놀라 창문에서 몸을 숨겼다.
봤을까?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했다.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때렸다. 바보같이, 왜 더 빨리 몸을 빼지 못했을까? 마당에서 무언가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언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미는 분명히 전달됐다.
다락방에 아이가 있다, 라고 얘길 나눴을 것이다.
끼이익, 하고 현관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신발을 벗지도 않은 엄마와 아빠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 문고리가 돌아가다 멈추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문을 안에서 잠가놨기 때문이다.
“마스터키 있지? 그거 찾아봐.”
엄마가 아빠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태껏 한 번도 저런 포지션을 취한 적은 없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킨 적이 없던 부부였지만 지금 이 모습은 이상했다. 마치 엄마가 두목인 것만 같았다. 아빠가 마스터를 찾느라 장롱을 뒤지는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이윽고 안방 문이 철컥, 하고 열려버렸다. 그들은 한걸음이나 접근해왔다. 다락방을 둘러보니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무기로써 의미를 부여하자면 구리로 된 요강 하나가 보일 뿐이었다. 요강을 한 손으로 들었다가 고개를 저으며 내려놨다.
“동진아, 동진아.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이리 나올래?”
엄마가 해주던 불고기는 또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지만 지금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이번 재료는 내가 될 테니까.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엄마와 아빠의 숨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마치 굶주림을 참지 못해 으르렁, 하울링 소리를 내는 맹수 같았다.
“이 새끼가 소원대로 같이 살아줬더니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아빠, 아니 아빠의 탈을 쓴 무언가가 폭언을 뿜어댔다. 그들은 안방 벽면을 마구잡이로 두드리며 다락방 입구를 찾는 듯 했다. 의아하게도 달마도를 들추면 찾을 수 있는 다락방인데 찾질 못했다. 그때 머리를 스쳐지나간 이미지 하나. 다락방 문에 부적이 붙여져 있었다. 그것이 효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 중 한사람이 안방을 나서 무언가를 들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촤악, 하고 벽에다 물 한바가지가 때려졌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부적이 물에 젖어버린 것이다. 다락방 문이 노출된 듯, 쾅! 쾅! 다락방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진아,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응? 이거 잠금장치 약해서 곧 부서질 거 같거든? 히히히.”
엄마의 목소리였다. 자세히 들어보면 엄마와 어떤 짐승의 소리가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소원을 이룬 대가가 참담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 가족은 다시 뭉치면 안 되는 가족이야.”
대체 왜 그랬을까? 할배는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 이유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다. 분명 나도 알았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을 들어 다락방 입구 쪽을 내려다봤다. 약하디 약한 잠금 장치가 흔들거리며 구부러지는 것이 보였다. 저 문이 벌컥, 열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체념하며 기도라도 하기 위해 합장했다.
그때였다.
“동진아!”
분명히 날 부르는 소리였다. 엄마와 아빠도 아닌 늙은이의 목소리. 할배였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할배는 부부가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자물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작업을 마치고 다시 몸을 들어낸 할배는 창문을 깨고 나오라 소리쳤다.
“할배! 창문을 어떻게 깨란 말이야?”
“야이! 멍청한 녀석아. 거기 요강 안보이냐? 그걸로 깨부수란 말이야.”
구리로 된 동글동글한 요강을 손에 쥐고 창문을 노려봤다. 손아귀에 힘을 잔뜩 주고 창문에다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마당으로 흩뿌려졌다. 창틀 크기는 다행스럽게도 작은 내 몸이 빠져나갈 공간만큼은 돼보였다. 몸을 우겨넣는 사이 다락방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힐끔 내려다보니 엄마가 몸을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눈이 뒤집어진 채 칼을 허공에다 휘두르고 있었다. 그 칼은 날이 바짝 서있었다. 할배의 재촉에 지체 없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지면에 발이 닿는 순간 할배가 붙잡아줬기에 착지 충격은 크지 않았다.
“괜찮냐? 우리 손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거실 베란다로 보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오금이 저렸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잔뜩 올라간 입꼬리는 내가 바란 부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할배는 내 손을 꼭 붙들었다.
“동진아. 지금부터 대나무 숲으로 냅다 달려야된다잉?”
“거길 다시 왜 가?”
할배의 손에 연이 들려있었다. 내가 그토록 찾던 연. 기억속의 연과 조금 달라져있었다. 연에 싯누런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아마 이런 작업을 위해 할배가 자리를 비웠던 것이리라.
“일단 달리면서 얘기하자. 얼른 따라오너라.”
잠긴 문을 깨부수기 위해 발악하는 부모를 내버려두고 집밖으로 나섰다. 할배는 흙길을 뛰면서 연신 뒤돌아봤다. 이내 둘 다 헉헉, 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할배, 우리 엄마랑 아빠 왜 저러는 거야?”
“너, 경배네 집에 갔었지?”
“어? 어어......”
“할아버지도 대나무숲에 있는 산신에 대해 잘 알아. 어릴 때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얘기해줬으니까.”
“나 산신한테 소원을 빌었었어.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가 다시 나타났는데......”
“그것은 산신이 아니여.”
할배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뜀박질을 멈췄다. 그는 계속해서 후방을 향해 경계태세를 갖췄다. 산신이 아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귀신이여. 이승만 대통령 시절 때부터 나타난...... 뱀 귀신. 아니 뱀 귀신들.”
뱀, 그것은 사람을 먹는 뱀 귀신이었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구실로 이혼 가정의 결핍을 가진 자녀의 마음속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매개체는 연이었다. 그것을 통해 소원을 빈 아이 부모에게 빙의해서 때가 되면 아이를 잡아먹었던 것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가 아닌 여러 무리였다. 거기다 암수 부부가 짝을 이뤄 행동했다. 주도권은 암놈이 쥐고 있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지시를 하는 모습이 그 이유였다.
“빌어먹을. 세상이 발달하면 뭐하나. 툭하면 애 싸질러놓고 갈라서는데.”
할배가 욕을 한바가지 내뱉으며 길에다 침을 뱉었다. 곧장 고개를 든 할배는 저 멀리 무언가를 응시했다. 내 시선도 할배를 따라 돌아갔다.
두 마리의 뱀. 아니 엄마와 아빠가 혀를 길게 뺀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할배는 대나무숲이 코앞이라며 뜀박질을 종용했다. 두말할 것 없이 달렸다.
스윽...... 스윽...... 대나무를 스쳐가는 소리가 숲속 가득 퍼졌다. 대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풀내음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우린 돌탑 앞에 도착했다. 할배를 쳐다보자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는 할배의 등을 두드려주자 진정이 된 듯 호흡이 차분해졌다.
“동진아, 할아버지가 이 뱀 귀신을 잘 아는 무당에게 갔다 왔거든? 여기 연에 부적이 붙어있지? 이 연에 불을 붙여서 하늘에 올리면 뱀 귀신이 자들한테서 떠나갈 거야. 대신 다시 소원을 빌어야 돼. 다시 원래대로 해달라고. 알았지?”
다시 원래대로 해야 된다고? 그 말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비록 부모의 모습이 정상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함께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칼을 든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쏟아져 나왔다. 연에다 불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동진아, 많이 놀랬지?”
누구보다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휙 돌리자 엄마와 아빠가 서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은 내가 알던 그들이었다. 비린내도 더 이상 풍겨오지 않았다.
“진짜 엄마야?”
“그래, 엄마야, 여기 아빠도 진짜 아빠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대체 뭘 한 건지......”
엄마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빠가 엄마 어깨에 손을 살며시 올렸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따스한 시선을 보내왔다.
“동진아. 그거 내려놔. 그거 불에 태워서 올리면 엄마랑 아빠 같이 못살아.”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진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연을 손에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할배가 대뜸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신 차려 이것아. 아직도 너희 엄마와 아빠가 왜 같이 살 수 없는지 기억 못 하는겨?”
“아버님이야 말로 정신 차리세요. 왜 동진이를 자꾸 흔드시는 거예요? 우린 지금 제정신이라고요.”
엄마가 거세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할배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품에서 성냥개비를 꺼내들어 연에다 불을 붙여버렸다. 내 손에 연 손잡이를 건네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선택이여. 잘 떠올려봐. 그동안 할아버지가 저것들 막아줄 테니까.”
할배는 부부와 맞설 요량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연은 바람을 타고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했다. 소원을 빌어야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할배에게 슬금슬금 접근해왔다. 약간의 탐색 전을 마친 뒤 세 남녀는 한데 뒤엉켜 몸싸움을 시작했다. 내게 다가오려는 자와 그것을 막아서는 자의 싸움.
연은 내 마음의 거울이라도 된 양, 올라가는 속도가 굼떴다. 연 손잡이에 감겨진 실을 풀어야 되는데 과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동안 난 잊었던 기억을 되찾아야 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진 이유, 같이 살 수 없게끔 가정을 박살낸 사건을 기억해내야 했다.
“영악한 뱀 새끼 같으니라고. 동진아. 뭣하냐? 빨리 연을 띄우라니까.”
할배의 다급한 일갈이 퍼졌다. 슬슬 힘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기세를 잡은 부부는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시선을 내게 뒀다.
“동진아, 그거 놓고 우리랑 같이 살자? 응?”
대체 무엇이었을까? 옥신각신하는 엄마와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펴보다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떠올렸다.
허무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나? 난 불타고 있는 연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다.
“다시 원래대로 되게 해주세요.”
안 돼, 하는 엄마의 비명과 함께 불타는 연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실이 빠른 속도로 풀리다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엄마와 아빠가 맥없이 쓰러졌다. 할배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내 어깨를 살짝 토닥이던 할배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쩌겠냐? 부모라는게 네 뜻대로 안될 수도 있는데.”
할배가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생각났다. 부정하고 감추고 싶었던 기억.
그것은 엄마의 외도였다. 조금씩 아빠와 내게 무관심해지던 모습이 의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꼬리를 밟힌 엄마는 아빠와 대판 싸우게 됐다.
그때 난 엄마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됐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했음을. 어린 내가 그 사실을 감당하긴 어려웠기에 그 기억을 애써 지웠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꿈틀거렸다. 하늘로 솟구친 연은 불타 버린지 오래였다. 부부는 사태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했다. 우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서로가 이 가정은 박살났음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대나무 숲을 걸어 나갔다. 아빠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 지쳐 널브러진 할배를 부축하며 일어났다.
“동진아. 아빠는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냥, 이란 말 다음엔 미안하다, 였을까? 아빠는 말을 이어가지 않은 채 앞장서서 걸어갔다. 난 아빠와 할배의 뒤를 밟았다.
다시 엄마와 살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박살난 유리컵은 다시 붙을 수 없다. 그걸 억지로 붙이다간 분명 큰 탈이 날 것이다. 지금처럼.
대나무 숲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히히히, 웃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아갔다. 이제 엄마 없이 살아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