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건국 직후의 명나라의 최대 적은 역시 북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직접적인 군사행동도 많았습니다. 홍무 2년에 서달과 상우춘을 중심으로 25만 명나라군이 북벌을 감행하여 원순제는 대도를 버리고 상도 개평부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북원이 세력 자체가 작아진 것은 아니었고, 지금의 산시성과 윈난성에는 북원의 세력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코케 테무르 같은 자는 감숙성을 기반으로 하여 북원의 재기를 노리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코케 테무르는 서달의 공격에 감숙을 버리고 카라코룸으로 이동하였고, 이문충은 상도 개평부를 공격하여 원순제를 계속 추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추격전에서 원순제는 도망치다가 사망하였고, 상도와 응창부마저 함락당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격전으로 인해서 명나라군도 많은 피해를 입긴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372년 서달의 카라코룸 진격에서 벌어진 피해입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명은 북원의 세력을 섬멸하는데 성공합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은 몇가지 대표적인 사례로는 1387년에 일어난 만주의 대기근으로 당시 남만주에서 20만 대군을 거느리며 우익에서 명을 견제하던 나하추가 항복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원은 명과 전쟁 상태라 교역자체가 금지되어 생필품을 나하추 등이 있는 만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남만주에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 나하추의 항복은 북원에게 경제적으로 그리고 북원의 대칸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명사의 기록을 보시죠.
나하추의 항복과 함께 20만의 명나라군도 요동이나 남만주 일대로 진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원이 당해버린 것은 1388년 당시 북원의 수도였던 부이르 누이(이는 원의 분봉왕 등 나하추 등에게서 지원을 받기 위해 수도가 이 지역이었습니다.)를 초토화시키고 7만에 이르는 몽골인들을 포로로 끌고 온 사건이었습니다. 명사에서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녕(大寧)을 나와 경주(慶州)에 이르러서는, 원주(元主)가 포어아해(捕魚兒海)에 있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 샛길로 아울러 진군하여 백안정(百眼井)까지 이르렀다. 포어아해와 4리 떨어져 있었는데, 적을 보지 못하니, 귀환하고자 하였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우리가 1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막북(漠北) 깊숙히 들어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었이, 갑자기 군대를 되돌린다면, (황제에게) 뭐라고 복명(復命)하시겠습니까?"라 했다. 남옥이 "그렇소"라 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땅을 파서 아궁이를 때워 연기와 불을 보이지 않게 하고, 야음을 틈타 포어아해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적의 영은 아직 포어아해 동북쪽 80여리에 있었는데, 남옥은 왕필을 선봉으로 삼으니, 질풍같이 내달려 그 영에 육박했다. 적들은 아군에 물과 풀이 모잘라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해, 방비를 하지 않았었다. 또 큰 바람이 불어 모래를 날려 낮이 밤같이 어두웠다. 군이 행군하였지만, 적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태위(太尉) 만자(蠻子) 등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항복시켰다. 원주(元主)가 태자 천보노(天保奴) 수십기와 함께 달아났다. 남옥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이를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원주의) 차자(次子)인 지보노(地保奴)와 비, 공주 이하 1백여인을 붙잡았다. 또한 추격하여 오왕(吳王) 타아지(朵兒只), 대왕(代王) 달리마(達里麻) 및 평장 이후 관속 3천명과 남녀 7만 7천여인, 아울러 보새(寶璽), 부칙(符敕), 금패(金牌), 금은인(金銀印)의 여려 보물, 말과 낙타, 소, 양 15만여 마리를 얻었고, 불태운 그들의 갑주나 의장은 쌓아 놓은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승첩을 경사로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칙서를 내려 그 공을 기리고 위로하면서 그를 위청(衞青), 이정(李靖)에 비견하였다. 또 합라장(哈剌章)의 영을 격파하고, 사람과 가축 6만을 노획했다. 군대가 귀환하니, 양국공(涼國公)으로 봉작을 올렸다. - 명사 남옥전 - 」
이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커서 북원에 소속되어 있던 유목민족들이 지속적으로 명나라에게 투항하게 되었고, 북원의 권위가 사실상 파탄의 지경에 빠짐으로써 몽골초원에서 유목민족들끼리의 대대적인 내전이 발생하여 북방의 위협은 많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2차 요동정벌의 시점에서 명나라는 나하추의 항복을 통해 남만주의 세력마저 확보하였고 그리고 실제로 이 지역에 20만에 이르는 군사를 보내는 위업(?)을 보입니다. 또한 나하추의 항복과 함께 급속도로 약해지고 있던 북원에게 마저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위업을 보입니다. 이러한 북변의 정리 사업으로 홍무제는 공세 일관적인 방어전략에서 비교적 수세적인 방어전략으로 임하게 됩니다. 영락제 때 이르러서 명은 다시 북변에 대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