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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끄적끄적한 글들입니당
게시물ID : readers_349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온기
추천 : 1
조회수 : 34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8/08 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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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1. 
애초부터 많은 뜻이 있지는 않았다. 
무얼 하고 싶다기 보다는 뭐라도 얽매이는 초조함이 싫었다. 
뭐든 벗어나면 그걸로 족했다. 
잡을 수 없는 것들을 만나면 홀연히 편안했다. 
기쁨을 찾아야 한다면 흐르는 길을 살폈다. 
머무는 공간에서는 기쁨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없었다. 
자주 찾는 길에는 오늘도 사람이 드물다. 
도착할 곳은 분명하지만 방향과 걸음수가 흐리다.
푸르러야 하는 여름, 구름은 여름을 대신해 검다. 
빗방울이 작게 내리지만 시원한 바람이 크게 불어 괜찮다. 
끈적이던 것들이 쓸려간다. 
남은 기쁨을 줍는다.

2.
비가 오는 날에는 말라버린 호수를 생각했다. 
수면 위로 둥글게 번지는 파동마다 호수의 숨이 는다. 
연잎에 쌓였던 먼지는 흘러내려 물 아래로 침전하고 몸뚱이가 제법 큰 민물어들은 묵은 더위를 식힌다. 
제초기에 잘려나가 밑둥만 남았던 잡풀들도 미음을 삼키듯 생을 다시 만난다. 
거리에 고인 물이 차갑다. 
미세하게 흩뿌리는 빗물들이 팔뚝을 식힌다. 
쉽게 마르기 어려운 날, 어디에도 갈증이 없다.

3.
물이 마른 호수에는 초원이 생겼다. 
미리 뿌리를 내렸던 연꽃들은 저마다 봉우리를 피웠다. 
봉우리의 흰빛과 분홍빛은 경계가 모호하여 하나의 색 같다. 
길쭉하게 우거진 풀숲은 새들의 서식처가 됐다. 
북적한 풀 사이로 보다 북적한 지저귐이 들린다. 
사람들은 그 틈을 비집으며 호수를 둘러 걷는다. 
미약하게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처럼 대부분은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가끔은 작은 무리가 방향을 달리하는데 서로 마주쳐도 체증이 없다. 
어우러진 풍경에 몸을 두고 별 생각이 없어 편안하다. 
이럴 때는 짚지 않아도 고른 맥박을 느낀다.

4.
세상에 기대했던 많은 것들이 창밖에 있을 때도 있었다. 
운이 좋게 몇 가지를 안으로 들이며 아주 먼 것들은 바라지 않기로 했다. 
들여온 것들을 돌보며 몇 해를 보냈다. 
이제는 내 안에도 계절이 네 개나 생겼다.

5.
폭이 짦은 하천길을 한적하게 걷는다. 
앞서가던 고민이 멈추고 뒤에 오던 미련은 보이지 않는다.  
여유를 챙겨 나온 사람들은 해결할 수 있는 걱정을 말한다. 
걸음은 이어지고 풍경에는 머무름이 없다.  
바람은 온순히 지나고 어디를 걸어도 순탄한 날에 닿는다.

6.
요즘은 하루의 틈이 길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이 공허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백이 없는 하늘은 그릴 수가 없다. 
별로 가득 찬 우주를 떠올리면 그 나름대로 진부하다. 
길어진 틈을 이용해 안 하던 산책을 나선다. 
어디든 봄이 완연하여 기분이 가볍다. 
부지런한 종들은 이미 개화를 마쳤고 목련은 반개, 개나리는 만개하여 보기에 좋다. 
꽃이 펴서 봄이 온다는 말에 믿음이 쌓인다. 
그러니 이제는 더욱이 맑은 하늘일수록 여백이 없이는 그릴 수가 없다.

7.
작아서 창과 가까운 내 방은 빗소리가 쉽게 넘어와 내 몸을 비에 둔 듯하다. 
적당히 식은 밥처럼 선선해진 공기가 창 턱을 넘는다. 
아무런 열기가 없어 오늘을 넘기는 일이 편안하다.

8.
풀어낼 것이 없는 요즘이다. 
이만하면 되길 바랬던 시간에 있다. 
찰나여도 순탄하여 마음이 놓인다. 
해가 저물어도 저리지 않고, 새벽이 와도 근심이 일지 않았다. 
주머니에 모인 동전처럼 두둑한 기분이 여기 잠시 머물렀다.

9.
뭐든 계절에 담아두면 시간이 지나도 몇 번을 되돌아온다. 
피어나는 입김에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시절에는 날이 저문 뒤에야 세상을 밝게 볼 수 있었다. 
해가 지면 그제서야 촘촘한 하늘 아래로 내가 있었고 그 뒤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몽땅 떨어져 식어버린 계절만큼 가만히 온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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