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의 심왕 겸직에 대해서 사견이 있어 이렇게 적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1)충선왕이 심왕이 된 것이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어서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심왕과 고려국왕은 별개의 위계였습니다. 충선왕이 심왕이 된 뒤, 고려 국왕으로 다시 복위된 것으로 보아 심왕 지위를 통해 원나라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정치세력들을 설득하여 다시 고려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국왕에 먼저 복위되어 심왕이 되었다면 고구려계승의식과 고구려 고토회복에 대한 열망이라는 명제 하에 연결고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선행관계를 따지자면, 충렬왕에게 다시 고려국왕 자리를 내준 충선왕이 원나라의 정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고려 국왕보다 작위가 높은 위계인 심왕에 올라 원나라에서 충렬왕보다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그 다음에 자신을 음해하던 고려 내부의 反충선왕 집단을 대거 숙청한 뒤 자신을 지지하는 원나라 수권세력의 도움에 힘입어 충렬왕을 몰아내고 충선왕, 자신이 고려국왕의 직위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고려해보면, 충선왕 1차 즉위(~폐위 되기 전) 때 보여준 개혁 의지에 대한 충선왕 본인의 신념이 원나라에서 공을 세우고 심왕이 된 시점에서 계속 유효했을까? 설령 유효했다고 하더라도 심왕이 된 이후 그리고 고려왕이 된 뒤, 보여준 기행적인 행태를 고려해 보면 충선왕의 심적인 변화(신념이자 소신의 변화)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결국엔 충선왕 본인의 흐트러지지않은 일변도라고 봐도 무방한, 즉 고려를 생각하는, 더 나아가 고려가 내건 정통성의 기치였던 고구려 계승의식이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에게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는 No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의 생각을 남깁니다.
1)충선왕이 심왕이 된 것이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어서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 후연의 모용수 시절, 부여의 왕자였던 '여울'이 후연에 항복하여 부여왕으로 봉해집니다. 그 전에 부여는 모용씨의 연나라에게 사실상 멸망의 공격을 당하여 부여의 왕과 5만여명의 백성들이 끌려오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그 지역 부여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연나라의 원할한 통치에 기여할 '여울'이 부여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가 뒷받침해주듯이 심왕도 또한 '여울'의 사례처럼 요동일대의 고려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무엇보다 정변에서 공을 세웠기에)에게 직위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명예직을 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