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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모용수의 죽음
게시물ID : history_15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104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3/25 23:25:22

태조 도무제 탁발규(拓跋珪)가 386년 1월에 북위(北魏 : 처음에는 대代라고 하였다가 386년 4월에 위魏라 개칭하였습니다.)를 건국한 직후에 북위와 후연과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후연과 북위는 연대하여 흉노 유현(劉顯)의 세력과 서연(西燕)에 대항했으며 양국은 빈번히 사절의 교환을 시행하였습니다. 하지만 391년 7월에 모용수(慕容垂)가 명마를 요구한 것을 북위가 거부하고 게다가 서연에 접근함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이후 하북 북부에서 양 세력은 자주 충돌하였습니다.

 

 

※ 비록 북위가 398년(천흥 원년)에 국호를 위(魏)라고 정했지만 이후에도 북위는 예전 국호인 대(代)와 위(魏)를 같이 사용하것 같습니다. 돈황(敦煌)에 있는 서위(西魏)의 벽화에는 「대대대위 대통원년(大代大魏 大統元年)」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용수는 서연을 멸망(394년 8월의 일입니다.)시킨 이후인 395년 5월 태자인 모용보(慕容寶) 등을 파견하여 10만 병력으로 북위 공격을 단행합니다. 후연의 공격에 북위군은 일단 오르도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양측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5개월 정도 대치상태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10월에 접어들면서 기후 조건이 악화되자 후연군은 일단 물러나 삼합피(三合陂)에 주둔하였습니다. 그러나 11월에 기후가 급변하여 황하가 얼어버렸고 이 틈을 타 북위군이 삼합피의 후연군을 급습했습니다. 북위군의 습격으로 후연의 군사는 혼란에 빠져서 크게 패배하였고 붙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자는 열에 한 두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전투 이후 북위와 후연과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삼합피(三合陂)라고도 하고 참합파(參合陂)라고도 합니다. 제가 참조한 책에서는 삼합피라 하고 두산백과사전에서는 참합파 혹은 참합피라고 하더군요. 

 

 

모용수는 396년 3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을 공격하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삼합피에 들러 작년의 전투에 사망자들에 대한 추도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추도의식 때 모용수는 피를 토하며 병을 얻었고 (아마 결핵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4월에 중산(中山)으로 돌아오는 도중 상곡(上谷)에서 갑자기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용수의 죽음으로 후연이 어지러움을 틈타 탁발규는 40만대군을 일으켜 후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합니다. 모용보도 북위의 공격에 맞써 싸우지만 후연은 거록(鉅鹿)에서 벌인 북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이 공격으로 후연은 황하 이북의 화북평원 대부분을 빼앗기고 맙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진남북조사(노간), 오호십육국, 네이버 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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