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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충선왕과 심양왕에 대한 이해
게시물ID : history_150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버나이특
추천 : 5/7
조회수 : 4292회
댓글수 : 38개
등록시간 : 2014/03/25 19:41:53
나라 간섭기 당시 심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랴오닝성(遼寧省) 일대, 요동 땅에는 고려의 전쟁포로, 이주민 등의 집단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었는데, 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직위라고 합니다. 그 전에도 안무고려군민총관(安撫高麗軍民摠官)과 같은 비슷한 역할의 직위가 있긴 했지만 심양왕은 이와는 달리 최초로 창설된 왕급의 직위였습니다. 이 작위가 창설되고 처음으로 봉해진 것이 충선왕입니다. 충선왕은 황위 계승 분쟁에서 무종 카이산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인종)를 지지한 대가로써 이 직위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왕과 심양왕 양쪽의 직위를 가지게 된 충선왕은 만주와 한반도 양쪽 모두의 통치자가 된 것이구요. 설마하니 아무 권한 없이 황위 계승 분쟁에서 무종 카이산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인종)를 지지한 대가로써 이 직위를 얻은 충선왕에게 요동 땅을 충선왕에게 맡겼을 거 같습니까? 충선왕은 그런 큰 공이 있고 원나라 황제의 사촌입니다. 적어도 행성주처럼의 권한을 주어 고려인 및 이주인들의 민심을 달래고 다스리려면 고려 출신이 적격이니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요동 땅을 다스리게 한 겁니다.
 
그리고 심양왕(瀋陽王)이 된 충선왕은 실권도 컸을뿐만 아니라 원나라 조정에 직접적인 정치에도 참여하였고 1310년 충선왕은 심왕(瀋王)으로까지 책봉됩니다. 참고로 몽골 제국을 포함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2자왕보다 1자왕을 더 높은 격으로 쳐 줍니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만이 아니라 이복형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延安君) 왕고(王暠)에게 심양왕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는 충선왕의 정책 때문에 고려 내에서의 권력을 잃은 이들이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탓인지 왕고가 심양왕이 된 후로 권한이 깍이게 되었습니다. 첨언하면 충선왕이 말년에 훗날 원나라 황제 인종의 아들, 영종의 황위 다툼에서 줄을 잘못 서서 티벳에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하게 되고(티벳엔 불경 및 불화 연구로 갑니다) 심양왕의 권한도 축소되게 됩니다.
 
심양왕 왕고는 고려왕위에도 욕심을 내어 사촌인 충숙왕을 참소하기도 하면서 괴롭혔고, 왕고 사후에 그 직위는 손자인 토크타부하(脫脫不花)에게 이어진다. 토크타부하도 고려왕위를 노려서 고려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원나라 몰락기에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 왕혜가 심양왕으로 봉해지지만, 고려왕위에도 욕심을 내어 공민왕에 대항하다가 패배한 후로 폐지되었다.
 
어째 이 심양왕 자리에만 올라가면 모두 고려왕을 노린다라는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도 그런 액션을 종종 취했습니다. 원나라가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 군림할 수 있게 일부러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도 이용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도 하구요. 사실 심양왕은 몽골 제국 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동방 3왕가에 대한 견제용(후방 견제용)으로 설치된 왕 직위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몽고 전쟁하여 항복하고 부마국 된 처음부터 동방 3가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항복하게 했다느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주장이 나오는 거면 가설인거지 무슨 사료와 논거인지 모르겠네요. 다들 학교 다닐 때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게 원나라가 고려를 동방 3가를 견제하기 위해 항복를 받았라고 배웠습니까?
 
참고로 동방 3왕가에 대해 설명하자면  칭기즈 칸의 동생들이 분봉받은 영지를 시작으로 하는 동북방의 보르지긴씨 분가들을 일컫습니다. 각각 옷치긴 왕가(칭기스 칸의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이 시조), 카치온 왕가(둘째 동생인 카치온이 시조. 단 카치온은 일찍 죽어서 그 자식이 분봉받았습니다.), 카사르 왕가(첫째동생인 카사르가 시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만주 일대의 영지에 더해 북중국, 남중국 일대에도 많은 영지를 지니고 원 황실의 권력투쟁에 깊이 개입했다고 합니다.
 
무슨 가설을 기정사실마냥 단정적으로 말하는데, 역사학계 주류도 그렀습니까? 당최 이해가 안됩니다. 가설을 가설 혹은 그런 주장이 있다라고 정도로 언급해야지 무슨 기정사실 마냥 사료도 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게 불쾌한 겁니다. 어디서 줏어 들은 걸 아무 자료나 논거없이 그냥 앵무새처럼 말하지 말고 가설이라는 것 전제하에 이러할 수 있고 그런 가설 혹은 주장이 있습니다라고 해야지 이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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